마음의 눈 뜨니 희망이 보이네, 손끝으로 한 땀 한 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화가 박환(59)씨는 앞을 못 본다. 사고로 양쪽 시력을 잃었다. 시각장애1급으로 밝은 빛에도 반응할 수 없다.

시각장애 화가로 2막 인생 박환 #잘나가던 화가, 4년 전 교통사고 #시력 모두 잃었지만 마음 다잡아 #실 잘라 밑그림 뒤 손끝으로 기억 #나무껍질 등 붙이고 손으로 색칠

사고 전에도 그는 화가였다. 2012년 서양화 개인전을 열었다. 캔버스에 나무나 유리를 붙이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해 나갔다. 이듬해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아트페어’에도 초청됐다. 화가로서 승승장구했다.

갑작스레 교통사고가 났다. 얼굴은 산산조각이 났고 머릿속에는 시한폭탄 같은 혈전이 생겼다. 보호자인 여동생 수희(57)씨는 의료진에게 생명과도 같은 눈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사고 당시 이미 왼쪽 시신경이 끊어졌고 수술을 여러 번 거치며 반쯤 남아있던 오른쪽 눈의 시력도 잃었다.

손끝의 감각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화가 박환씨. 무명실이나 나무껍질 등 다양한 소재를 이용하는 그의 강원도 춘천 작업실은 은은한 나무향으로 가득 했다. 그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대신 상상력으로 물감을 배합하고, 붓 대신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장진영 기자]

손끝의 감각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화가 박환씨. 무명실이나 나무껍질 등 다양한 소재를 이용하는 그의 강원도 춘천 작업실은 은은한 나무향으로 가득 했다. 그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대신 상상력으로 물감을 배합하고, 붓 대신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장진영 기자]

집으로 돌아온 그는 좌절의 나날을 보냈다. 거실에 웅크리고만 있었고, 삶을 저버릴까도 생각했다. 어느날 여동생이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볼 수 없는 사람에게 그림이라니. 화가 난 그는 “그럼 네가 눈을 감고 그림을 그려봐”라며 반발했다. 하지만 어차피 안 될 거란 생각으로 바닥에 연필과 스케치북을 놓고 삐뚤빼뚤하게 동그라미, 선, 이름을 그려봤다. “거봐, 되잖아”라는 여동생의 응원이 이어졌다. 그림을 그리니 나쁜 생각이 사라졌다. 그림 생각만 났다. 이것저것 그리며 오랜만에 ‘완성’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림이 쌓일 때마다 달라졌다는 여동생의 평가는 그를 다시 그림에 매달리게 만들었다.

이듬해 봄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사고로 시력을 잃은 지 5개월 만이다. 보면서 그릴 수 없으니 무명실을 잘라 캔버스에 붙이며 밑그림을 그리고 경계점마다 핀을 꽂아 손끝으로 구도를 외운다. 손가락으로 물감을 찍어 채색한다. 칸막이로 된 물감통의 순서를 기억해 색을 섞고 칠한다. 간혹 엉뚱한 색을 칠하기도 한다.

사고 전 작품인 ‘고향 집’. [작품사진 박수희]

사고 전 작품인 ‘고향 집’. [작품사진 박수희]

그는 동시에 6~7점을 그린다. 물감이 덜 마른 상태에서 만지다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완전히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때문이다. 어제 만난 사람은 잘 기억 못해도 작업하는 캔버스의 위치와 그 위에 꽂힌 핀 개수는 정확하게 외운다. 손끝으로 기억하며 작업한다.

최근 강원도 춘천에 있는 그의 작업실 겸 집을 찾았다. 현관문을 열자 은은한 나무 향이 났다. 산에서 주워온 나무껍질을 캔버스에 붙여 고목나무를 만들고 있었다. “작은 조각 여러 개를 이어 붙이다 보면 신기하게도 모양새가 맞춰져요. 나무 위에는 새싹을 그릴 예정이에요. 희망과 살고 싶은 의지의 표현이랄까요?”

사고 후 그린 그림인 ‘외딴집’. [작품사진 박수희]

사고 후 그린 그림인 ‘외딴집’. [작품사진 박수희]

시각장애 화가로서의 2막의 삶 동안 30여 점을 그렸다. 지난 1월 ‘눈을 감고, 세상을 보다’라는 개인전도 열었다. 관객 대부분은 시각장애인 화가인 것을 모르고 왔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대단하다는 말을 하며 그에게 “희망을 줘서 고맙다”고 했다. “전시 후 내가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 후론 더 작품에 매진했죠.” 사고 후 그림풍이 달라졌다는 평을 들었다. 이전엔 큰 사건이나 서민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다뤘지만 지금은 삶을 희망적으로 표현한다.

“제 작품 중 열린 지퍼 사이로 풍경이 보이는 ‘열린 마음’을 가장 좋아해요. 지퍼를 열듯이 마음을 열면 아름다운 세상이 보인다는 말을 하고 싶었죠.”

남들보다 더딘 작업이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이렇게 되고 나니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감사해요. 나는 오로지 그림으로만 희망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어요. 대부분의 작업도 행복과 희망에 관한 것이죠.” 그는 손끝으로 희망을 그린다.

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