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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균형 잃은 과거 들추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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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최근 정부 내 역사적 기록물에 대한 보존실태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같은 내용을 함께 공개했다. 이는 거창 이외에 전국 5곳에서 당시 한국군과 경찰에 의해 520여 명의 민간인 학살이 이뤄졌다는 충격적인 사실이다. 집단학살을 공식 확인해 주는 정부 차원의 첫 자료인 만큼 역사적 가치도 크다고 기록원 측은 강조했다.

역사적 기록물을 발굴해 공개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한 시대의 사건을 제대로 읽고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어두운 과거를 무조건 묻어두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북한이 인민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록을 전혀 공개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의 기록만 공개하는 것도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마치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의한 잔혹행위는 없었고, 한국군과 경찰만 만행을 저질렀다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인민군과 한국군의 점령이 반복된 지역에선 한국과 북한 양측에 의한 만행을 경험했다는 게 공공연한 사실이다. 어느 한쪽에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는 부분이다.

정전협정 체결 당시 공보처 자료에는 남한에서 토착 공산세력이나 인민군에 의해 살해된 무고한 피해자의 숫자가 적혀 있다. 양민이 12만8936명, 피랍자가 8만2595명에 이른다.

박효종(서울대 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는 "최근 몇 년 사이 국군 아니면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양민학살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어 우려스럽다"며 "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은 전체적인 조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과거사 문제의 경우 산발적으로 관련 내용이 공개되면서 과거를 둘러싼 불필요한 갈등이 우리 사회를 너무 자주 요동치게 만들고 있다.

16개 과거사 관련 위원회는 동학혁명부터 최근의 권위정부까지 과거를 파헤치고 있다. 지난날 한반도에서 있었던 반목과 대결의, 아픔의 역사는 이제 역사학자에게 평가를 맡겨야 한다. 기록원 측은 학자들에게 기록을 조용히 넘기면 됐다. 기록원이 '원한의 역사'를 끄집어내 기자회견을 열어 이를 공개하면서 과거의 상처를 들춰낼 필요가 있었는지 아쉬움을 남긴다.

조강수 사회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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