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40. '뮤직파워' 해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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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뮤직파워' 여성 멤버들과 함께한 필자. 뮤직파워로 야심차게 가요계에 복귀했지만 디스코 음악이 판치는 현실의 벽은 높았다.

어딜 가나 "손님들 스텝에 맞지 않는다"며 내 음악을 타박하긴 마찬가지였다. 나이트클럽에서는'춤추기 좋은 음악'을 요구했다. 수모도 여러 번 겪다 보니 차차 적응이 됐다. 더 이상 웨이터와 싸움질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트클럽 업주들은 우리 팀을 한 달 정도 고용하고 곧바로 내치곤 했다. '신중현'이란 이름 석 자를 클럽 홍보용으로 쓴 것이다. 그 한 달간의 홍보 기간이 지나면 싸구려 밴드가 우리 뒤를 이어 무대에 섰다.

활동금지로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음악계 판도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5년의 세월이 결코 짧지 않았던 것이다. 그 시절엔 디스코 음악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었다. 디스코는 정권을 비판할 여지가 없는 음악이었다. 그저 생각없이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음악이니 규제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디스코 음악엔 '음악성'이라 부를 무언가조차 없었다. 음악인들 사이에선 '발 맞추는 음악'으로 통했다. 베이스 라인이나 드럼 모두 행진곡처럼 '쿵쿵쿵쿵'하고 일률적인 리듬을 타기만 하면 됐다. 록의 '쿵쿵 딱 쿵쿵 딱'하는 등의 멋을 살리는 리듬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음악적 수준이 고만고만하다 보니 밴드의 실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쇼 무대도 음악성보다는 그저 화려한 의상이나 쇼맨십만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아무나 음악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나이트클럽은 내 자존심에는 어울리지 않는 무대였다. 그러나 대중의 취향은 이미 디스코 음악으로 옮겨져 있었다. 1982년, 결국 뮤직파워는 결성 2년 만에 해체됐다.

우울했다. 디스코 음악만이 판치는 와중에 록음악의 미래를 찾을 길이 보이질 않았다. 다시 모든 걸 잃어버린 상태가 된 것이다.

연예인 대마초 사건을 비롯한 가요정화운동은 그저 몇몇 연예인들의 인생만 암흑 속으로 몰아넣은 게 아니었다. 그 사태로 한국 대중음악은 10~20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내 전성기 때는 쏙 들어갔던 트로트가 다시 라디오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나는 70년대 초 일본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신중현 사단이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할 때였다. 사실 일본에서 활동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원한다면 섬을 사주겠다. 헬리콥터도 사주겠다…"

그들은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했다. 그러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본인으로 귀화하라는 조건을 달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거절했다.

'한국의 대중이 내 음악을 좋아하는데 어떻게 신중현이란 이름을 버리겠는가'. 이런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차버린 셈이 되긴 했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그때만 해도 일본의 음악 수준이 우리보다 나을 게 없었다. 오히려 우리가 앞서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음악성과 음악적 다양성, 연예 활동 시스템까지도 일본은 멀찌감치 우리를 앞서 있다. 7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한 경제 성장이 이뤄지면서 천박한 향락문화가 판친 영향도 크다고 생각한다. 흥청망청 마시고 춤추며 노는 놀이음악이 주류가 됐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진정한 음악과 예술이 설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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