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사는 노인의 듬직한 '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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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서울 금호동 벽산경로당을 찾은 김재성씨가 독거 노인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안성식 기자

"난생 처음 서양춤도 배워 보고, 불꽃놀이에다 강강수월래도 하고…. 아주 호강을 했다니까."

서울 금호동 벽산경로당의 터줏대감인 양성도(72)씨는 지난해 10월 1박2일간 다녀온 양수리 펜션 나들이를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같은 동네에 사는 독거노인 일곱 명이 함께 떠난 이 여행엔 친손주보다 더 살갑고 싹싹한 대학생 15명이 동행했다. '손자손녀의 도리를 다하여 희망을 주는 사람들'(손도희)이란 동아리의 회원들이다.

SK텔레콤이 후원하는 대학생 자원봉사단 '써니'에서 만난 이들은 '독거노인 지킴이가 되자'는 한뜻으로 지난해 7월 '손도희'를 만들었다. 3~4명이 한 조가 돼 성동구 일대의 독거 노인들을 찾아가 집안 일을 돕고 말벗을 해왔다. 그러다 '손도희'의 리더이자 맏형인 김재성(29.한국영화교육원 영화연기과 2년)씨가 나들이 아이디어를 냈다. 평소 찾는 이도 없이 외롭게 살아가는 노인들에게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아름다운 여행을 선물하자면서.

돈이 문제였다. 지난해 9월 '써니 대학생자원봉사 공모전'에 나들이 계획을 응모해 상금 50만원을 확보했다. 그래도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다. 다행히 김씨가 방학 중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펜션 주인에게 간청해 장소를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에 빌렸다. 몇몇 대기업 사회공헌팀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 끝에 100만원의 후원금도 받아냈다.

그렇게 해서 떠난 여행길. 아이처럼 좋아하는 노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 사진들을 지난해 11월 지하철 을지로 역사에서 일주일간 전시하면서 모금 활동을 펼쳤다. 12월엔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독거노인들과 찜질방 나들이도 했다.

김씨가 벽산경로당에 인사차 들른 15일. 노인들이 너나없이 달려나와 손을 잡고 반겼다. "아이고, 고마운 젊은이가 왔구먼 그래." "자주 못 들러 죄송해요. 올해도 꼭 나들이 시켜드릴게요."

김씨는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려다 내가 더 행복해지는 게 봉사의 매력"이라고 했다. 그래서 학교 공부하랴, 아르바이트하랴, 오디션 보러다니랴(김씨의 꿈은 배우가 되는 것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가운데서도 일주일에 이틀은 봉사활동에 나선다. 하루는 왕십리에 사는 50대 후반의 장애인 '누님'을 찾아보고, 나머지 하루는 양천구 신정복지관에서 방과후 시간을 보내는 초등학교 5학년짜리 '동생'을 돌본다.

"2003년 처음 봉사에 입문해 소외 아동과 1대1 결연을 맺고 바다 여행을 떠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어요. 불과 이틀을 함께했을 뿐인데 헤어지던 날 내 팔을 꼭 붙들고 울먹이던 아이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졌어요. 그때 결심했죠. 평생 봉사의 끈을 놓지 않겠다고…."

신예리 기자<shiny@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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