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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의 기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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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에펠탑 열쇠고리를 사라고 우기는 북아프리카 흑인으로 인해 잠시 중단됐던 얘기는, 왜 우린 일찍이 소설이 없었는지로 넘어갔다. 난 그건 우리 문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목민심서'가 대단하다 하나, 한 페이지 들여다본 적 없고, '삼국사기'가 어떻다 해도 한 페이지도 직접 이해할 수 없는 게 우리 문화의 서글픔이다. 기껏해야 작자 미상의 '춘향전'이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고전소설의 꽃이고, 남아 있는 대부분의 문헌이 한자이기 때문에 한자를 좀 안다 쳐도, 누군가 번역해 주지 않고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말하자면 중국의 웬만한 사람이라면 읽을 수 있는 수천 년의 기록이 내겐 아무 의미 없는 암호문 같은 것이다. 슬픈 일이다. 2층짜리 주택의 이미지가 부재한 것은 내 방식의 문화였다고 우길 수 있으나, 말은 '안 살 거예요'라고 하면서, 쓰기는 '아부구매(我不購買)' 등으로밖에 쓸 수 없었던 세상은 참혹한 암흑의 시절이었다고 생각된다. 1889년 1층짜리 집에 살던 우리 증조할머니의 설움은 그런 것이었을 테다.

강대국의 언어를 쓰는 것, 그리고 서구 문물의 수용 여부가 삶의 품격을 규정해 주던 시절부터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신문에 우리 글자가 온전히 쓰인 지 몇 년 되지 않는 오늘날, 이제 겨우 10여 년 한국민들의 삶 한가운데 자리를 틀기 시작한 한국 영화를 지켜내기 위한 스크린쿼터제를 둘러싼 여러 논의가 있다. '스타워즈'나 '마지막 황제'를 통해 권력과 탐욕의 비극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왕의 남자'를 보는 것이 경제적인 의미를 떠나 우리 삶의 결들을 좀 더 심오하게 들춰보는 상대적으로 더 좋은 방법이라고 친다면, 가까스로 얻어낸 우리의 21세기형 언어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자국민들에게 수없이 많은 상처와 실망과 배신감을 안겨줬다. 많은 사람이 떠났고, 또 떠나고 싶어한다. 바깥세상엔 우리에게 없는 것이 널렸고, 열등감을 자극하는 비교 대상도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도 한국말과 한국글자와 한국문화의 본원적인 필요성을 흔들 수는 없다. 에펠탑 앞에서 주눅 들었던 한국 주택의 키높이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엉터리든 고품격이든, 우리의 삶을 표현해낼 우리의 언어를 다시 잃는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세상이 그만큼 덜 아름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민규동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