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그냥 넘길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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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근 20년동안 소위 재야권에 몸담으며 옥고까지 두어 번 치른 사람으로서 작금 야권 정황에 대한 사견부터 털어놓는다면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지난번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책임은 유야무야로 넘어갈 일이 아니라, 철저히 가려내 책임져야할 사람들은 국민과 역사 앞에 분명히 책임을 지고 거취를 밝혀야만 한다. 이래야만 그동안 그들이 노상 잘 쓰던 「책임정치」라는 말에도 합당해진다.
물론 이 말은 일단 단일화에 실패한 두 김씨를 주로 겨냥한 것이지만, 엄격히 말해 그 실패가 어찌 두 김씨만의 책임이겠는가. 하늘 아래 두번 다시 있을 수 없는 그런 일을 가능케 한, 오랫동안 누적된 야당가의 정치행태와 생리, 갖은 비리와 오탁, 역사와 국민을 무서워 할줄 모르는 독선, 구태의연한 시대착오적 썩은 붕당적 인맥 등등 야권정치인 전체의 책임으로 귀결되어야 마땅하다. 바로 그 선두에 두 김씨가 있을 뿐이다.
2월 선거건, 4월 선거건 시일이 너무 촉박하다는 건 그들의 사정이지 우리 국민으로선 알바 없다. 그런 것을 핑계삼아 지난번 선거에서 만천하에 드러났던 야당가의 문제점을 또다시 유야무야로 넘기려고 든다면 두번 거푸 국민을 짓밟는 일이고 우롱하는 짓이다.
한달 전의 선거에서 그렇게 패배하고 나서, 참으로 뼈를 깎는 자기혁신 없이 그냥 이대로 총선거에 나서겠다는 배짱이야말로 얼마나 염치없는 뻔뻔하고도 안이한 생각인가. 다가올 총선거에서 몇 석 당선되고 안되고의 문제가 아니라, 야당의 기성 정객들은 지난번 대통령선거 결과에 책임을 통감, 신선한 새 세대에 자리를 물려주고 이참에 총 퇴진할 각오까지 해야한다.
둘째, 그동안 재야권을 이루고 있던, 노상 그 사람이 그 사람이던 이름 바랜 인사들은 일단 원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원제자리로 돌아가서 뼈를 깎는 자기점검부터 해야한다. 그동안 자신의 처신에 문제는 없었는가, 자기도 모르게 부지불식간에 명리를 탐하는 쪽으로 기울어지지나 않았는가, 세상 이목에 이름 석자가 오르내리게 되면서 괜히 우쭐해져 분수 없이 돌아가지나 않았는가, 고생한 보상을 어떤 식으로건 받아먹어야 겠다는 생각은 혹시 없었는가, 기성 정치권에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휘말려 들어있지나 않았는가, 일단 자기자리로 돌아와서 허심탄회하게 자기점검부터 해야한다.
그렇게 신부는 성당으로, 목사는 교회로, 교수는 대학으로, 스님은 절로, 변호사는 법조계로, 문인은 문단으로, 근로자는 공장으로, 농민은 농촌현장으로, 자기들 고유의 터전으로 돌아가 일단 자신들부터 점검하는 것으로 새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어찌 정치의 민주화만이 민주화이겠는가. 물론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 이 정치의 민주화임엔 틀림없지만, 민주화의 실질 알갱이는 사회적 민주화, 각계각층의 건전한 자율화에 있는 것이다. 지나간 40년동안 누적되다 못해 더뎅이로 굳은 딱지가 앉아있는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갖가지 시대착오적인, 비민주적인 행태들의 불식이야말로 민주화의 실질 알갱이이다.
바로 그걸 이뤄내기 위한 수단이 정치의 민주화인 것이다. 따라서 재야권 인사들은 제각기 자기고유의 터전으로 돌아가서 가까운 주변부터 챙겨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문제가 생긴다. 어디로건 돌아갈 곳이 딱히 없는 사람들은 어쩌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 새로운 야권 개편의 단초가 도사려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셋째, 돌아갈 곳이 없는, 오랫동안 운동권에 몸 담아온 사람들, 6·29를 빼앗아낸 주역들, 얼마 안 있어 몽땅 풀려날 정치범들 (그렇다, 몽땅 풀려나야 한다!) ,명리를 탐하지 않고, 기성 정치행태에 오염되지 않고 진정으로 매오라지 이 시대의 소금이 되고자 싸워온, 돌아갈 곳이 없는 새 사람들은 속히 한자리에 모여야 한다. 이념적인 동질성으로건, 과도기적인 연합으로건, 어쨌든 한 자리에 모여서 새 구심점을 하루빨리 이룩해내고, 새로운 청신한 판도를 펴야한다.
끝으로 한마디 덧붙인다면, 작금 몇 달 동안의 우리사회는 방죽 터진 것 마냥 지나치게 정치로만 홍수를 이루고 있다. TV·라디오·신문·월간지·주간지, 모든 매체들도 정치인 이외에는 사람다운 사람이 우리 사회에 안 살고 있지나 않는가 하고 착각이 들 정도다. 이 점, 우리 언론들도 주로 추세를 뒤쫓아 다니기만 하는 버릇에서 원천적으로 헤어 나와 깊은 자생이 필요하다. 정치인들이 마치 초일급 스타들처럼 되어 있는 것부터 우리사회 병폐의 근원이다.
요컨대 정치 지망생이 많다는 건 ,금배지 지망생이 많다는건 이 사회에 날건달들만 양산된다는 뜻이고, 그만큼 불건전한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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