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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올드보이의 천국 된 금융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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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한애란 경제부 기자

한애란 경제부 기자

“이번만큼은 소위 ‘관피아’라는 부끄러운 용어를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추방하겠다는 신념으로 관료사회의 적폐를 확실하게 해결하겠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누굴까.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2014년 4월 29일 세월호 참사 14일째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돌이켜보면 그는 적폐 청산이란 말을 처음 유행시킨 사람이다. 적폐(積弊)라는 생경한 한자어를 일상 언어화했다.

구속 재판 중인 전직 대통령의 오래 전 발언을 끄집어낸 건 요즘의 관피아(관료+마피아) 논란 때문이다. 손해보험협회엔 전직 금융감독위원장이 취임했다. 윗선의 퇴진 압력을 폭로하며 회장이 사임한 한국무역협회에도 전직 산업자원부 장관이 새 회장에 선출됐다. 민간 단체장 중에서도 고액 연봉으로 유명한 은행연합회장 자리에도 옛 재무부 출신 인사가 거론된다. 생명보험협회 회장 후보 하마평에 거론되는 이들도 모두 관료 출신이다. 다들 퇴임한 지 10년이 된 OB(올드보이) 관피아다.

최근 상황이 혼란스러운 건 대다수 국민이 그에 동조할 리 없다고 믿어서다. 2014년 봄, 세월호 참사를 목격한 국민들은 관피아 척결에 한목소리를 냈다. 진보·보수 구분이 없었다. “관피아 청산 약속을 지켜라”, “정피아(정치+마피아)까지 척결하라”는 요구가 거셌다. 제 2의 세월호 사태는 절대 없어야 한다, 국가는 국민을 지켜줄 수 있어야 한다는 민심의 반영이었다. 그리고 이 민심의 불씨가 이어져오다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계기로 폭발했다. 관피아 척결은 촛불정신과 맥이 닿아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는 듯하다. 보수 정권 시절에 관치와 낙하산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했던 학자나 시민단체를 요즘 취재하다보면 당황스럽다. 똑같은 주제로 질문했는데 “그 얘기는 하지 말자. 나중에 다른 걸 물어봐달라”며 답변을 피하거나, “답을 다 정해놓고 물어보는 것 아니냐. 답하지 않겠다”며 신경질적으로 나와서다. 세상이 바뀌면 신념도 바뀌는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신념이 아니었을까.

그 결과 적폐 청산을 국정과제 1순위로 앞세운 정부에서 관피아 낙하산 행렬은 이어지고 있다. 민간 출신이 채웠던 금융협회장 자리는 손보협회를 시작으로 OB 관피아들이 하나씩 차지할 기세다. ‘6개 금융협회장 모두 민간 출신’을 유일하게 기록한 게 박근혜 정권이라니. 아이러니다.

한애란 경제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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