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민우의 블랙코드

황지우와 고대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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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최민우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장
최민우 정치부 차장

최민우 정치부 차장

이명박 정부가 막 출범한 2008년 3월, 문화예술계는 시끄러웠다. 유인촌 신임 문화부 장관이 “노무현 정권에서 임명된 산하 기관장은 알아서 물러나라”고 천명해서다. 김정헌·김윤수 등 실명도 거론했다. 좌파 진영은 “결코 물러날 수 없다”며 거칠게 저항했지만 권력의 완력은 더 거칠었다.

사실 MB정권이 칼을 대고 싶었던 곳은 이른바 ‘좌파의 소굴’이라던 한국예술종합학교였다. 특히 황지우 당시 총장을 솎아내고 싶었지만, 단지 좌파 인사로 낙인찍기엔 황 총장의 문학적 성취도와 대중적 지지 등이 만만치 않았다. 고민하던 문화부는 이듬해 감사 카드를 꺼내들고는 “황 총장이 전시회를 하겠다며 학교발전기금 600만원을 받고는 안 열었다”는 이유로 교육부에 중징계를 요청했다. 황 총장은 즉각 “전형적인 표적 감사”라고 반발하고 자진 사퇴했다. 그의 퇴진과 관련해선 우파 일각에서조차 “탈탈 털었는데 마땅한 게 안 나왔으면 그냥 덮지, 기껏 600만원 갖고…”라는 지적이 나왔다.

블랙코드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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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 사정 논란은 8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은 듯싶다. 최근 등장인물은 고대영 KBS 사장이다. 딱히 쫓아낼 결정적 한 방을 찾지 못하자 현 정부가 들이민 건 ‘200만원 수뢰설’이다. 지난달 23일 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는 보도자료에 “KBS 담당 정보관이 당시 보도국장(고대영)을 상대로 불(不)보도 협조 명목으로 현금 200만원을 집행한 것에 대한 예산신청서·자금결산서 및 진술을 확보했다”고 기술했다. 고 사장 200만원 수수를 기정사실로 한 거다.

하지만 따져 보자. 검찰이 이런 식으로 흘려도 ‘피의사실 공표죄’에 걸린다는데, 국정원 개혁위는 한쪽의 진술만 갖고 마음대로 발표해도 되는 초법적 조직인가. 고대영이란 인물이 반론권을 보장해 줄 필요가 없는 파렴치범이라서? 이런 식의 용감한 폭로라면 항간에 떠돌고 있는, 국정원 특별활동비를 받았다는 현역 의원 5명도 다 까발려야 하는 거 아닐까.

문재인 대통령은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에 대해 “검찰 관계자라는 이름의 속칭 ‘빨대’가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보탰다”고 비난했다. 저서 『운명』에선 “수사 중인 피의자는 아직 무죄다. 국민의 알권리로 인권유린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기술했다. 하물며 고대영은 피의자도 아니다.

최민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