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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파일] 극 전개는 팽팽, 인물 설정은 느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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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악인이 벌 받는 거야 당연한 일지만, 때로는 선량한 사람도 징벌 같은 고통에 처할 수 있다. 이럴 때 두 갈래 반응은 이렇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라는 억울함이 하나. 다른 하나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식으로, 딱히 이번 일과 인과관계가 없더라도 공연히 드는 자책감이다. '손님은 왕이다'(23일 개봉)는 이런 사람의 심리를 재료로 긴장감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스릴러물이다.

주인공 창진(성지루)은 자신의 직업에 품위와 자부심을 잔뜩 갖고 살아온 이발사다. 미모의 부인(성현아)은 일상적으로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겉으로는 남편을 한껏 사랑하는 척한다. 이런 창진네의 표면적인 평화는 어느날 손님인 양 나타난 양길(명계남) 때문에 위협을 받는다. 양길은 창진의 뺑소니 행적을 알고 있다며 올 때마다 점점 더 큰돈을 요구한다. 사실 창진은 매매춘을 시도하다 속아서 지갑만 털린 일이 있다. 그 때 창진은 상대가 두고 간 휴대전화를 돌려주겠다는 순진한 생각으로 골목길에서 차를 몰고 뒤를 쫓았었다.

여기까지의 얘기는 사실 영화의 절반에 불과하다. 스릴러의 재미를 위해 나머지를 아낄 수밖에 없지만 힌트 정도는 괜찮을 듯싶다. 한때 충무로의 온갖 영화에 단역.조역 가림없이 출연해 '한국 영화는 두 가지가 있다. 그가 나오지 않는 영화와 나오는 영화'라는 희한한 분류법까지 유행시켰던 배우가 있다. 관객이 이름조차 기억 못하던 시절, 중년의 만년 조연배우가 실생활에서 겪었을 곤궁함은 굳이 말로 해 무엇하랴. '손님은 왕이다'는 실제로 명계남이라는 배우의 인생에서 한 대목을 빌려온 듯한 이런 인물을 등장시켜 수수께끼의 열쇠를 쥐여준다.

이 영화의 재료는 이처럼 단순하다. 배우의 연기와 흑백의 이발소 세트를 중심으로 협박하는 자와 협박당하는 자 사이의 긴장을 꾸준히 고조시켜 간다. 언뜻 연극적으로도 보이는 이런 전개방식은 미술용어를 빌리면, 미니멀리즘을 차용한 듯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충무로 입성 이후 본격적인 주연을 처음 맡은 성지루의 연기 역시 잘 정제돼 있다. 순진한 천성의 한 남자가 자책감(그 원인이 아내의 불륜인지, 자신의 실패한 매매춘 시도인지 모를) 때문에 협박에 저항 못하고 억눌리다가 분노를 격발시키고, 결국은 상대에 대한 연민을 갖게 되는 감정의 흐름을 영화 전체의 분위기에 맞춰 과장없이 그려낸다.

이 영화의 순제작비는 19억5000만원. 충무로 상업영화의 평균치를 크게 밑도는 예산으로 깔끔한 스릴러를 만들어낸 시도가 새롭다. 하지만 중반 이후 미스터리의 실체를 뭉텅이 실타래를 쏟아내듯 풀어내는 전개는 전반부의 밀도 있는 긴장과 대칭을 이루지 못한다. 협박자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등장하는 것에 비해 다른 인물들의 배경설명이 적은 점도 결과적으로 소시민의 이발사에서 출발한 이 스릴러 전체의 무게중심을 애매하게 만든다. 인물 사이의 긴장을 효과적으로 구축하는 데는 성공했으되, 영화의 결론처럼 관객이 그 인물들에게 연민을 품게 될지는 미지수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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