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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독재, 이념보다 생존 우선한 다수승리연합의 결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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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7호 22면

[세상을 바꾼 전략] 1인 장기집권 체제

맨 왼쪽 사진이 원본이다. 권력 투쟁에서 스탈린 옆의 인물이 하나씩 축출됨에 따라 사진에서도 하나씩 사라져갔다. [위키미디어]

맨 왼쪽 사진이 원본이다. 권력 투쟁에서 스탈린 옆의 인물이 하나씩 축출됨에 따라 사진에서도 하나씩 사라져갔다. [위키미디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7년 11월(러시아가 1918년 초까지 채택한 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에 발생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은 세계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진화된 모습이 자기모순적이라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결정적 순간마다 다수 규합 #경쟁자 제거하며 1인체제 구축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연대 맞서 #우파 부하린과 손잡고 다수 확보 #좌파 주요 지도자들 제거 후엔 #다시 좌파와 연대, 부하린 축출

그 진화의 변곡점은 지금으로부터 꼭 90년 전인 1927년 11월 12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레프 트로츠키(본명 레프 브론슈타인)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등을 공산당에서 제명한 사건이다. 이는 이오시프 스탈린 1인 지배 체제의 출범이자, 공산주의가 1인 장기 지배 체제로 구현되는 좋지 않은 관례의 시작이었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꼭 35년 전인 1982년 11월 12일, 유리 안드로포프가 새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됨으로써 스탈린, 니키타 흐루쇼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순으로 55년 동안 이어지던 소련의 1인 장기 지배 체제는 막을 내렸다.

1인 장기 지배 체제의 와해는 한순간에 일어나지만, 구축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스탈린의 1인 지배 체제 구축은 결정적 순간마다 다수를 규합하여 경쟁자를 제거하면서 이뤄졌다. 다수를 동원하더라도 그 출발은 늘 소수에서였다. ‘평화·땅·빵’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볼셰비키 혁명 자체가 그랬다.

레닌, 스탈린 해임 뜻 문서로 남겨

나치를 상징하는 용의 사체 위에서 악수하고 있는 소련군과 영국군. 독일이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공격한 1941년에 제작된 소련 포스터. [위키미디어]

나치를 상징하는 용의 사체 위에서 악수하고 있는 소련군과 영국군. 독일이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공격한 1941년에 제작된 소련 포스터. [위키미디어]

1903년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2차 대회 때 표결에서 이긴 레닌파는 자신을 다수파라는 뜻의 볼셰비키로 부르고, 상대 파벌인 마르토프파를 소수파라는 의미의 멘셰비키로 불렀다. 사실 당시 볼셰비키는 다수파로 불릴 정도의 광범위한 지지 기반을 갖지는 못했다. 스탈린이 직접 볼셰비키 근거지를 마련한 그의 고향 조지아에서도 볼셰비키는 소수에 불과했다. 소수 정예의 직업적 혁명가 위주로 중앙집권적 당 구조를 중시한 볼셰비키는 명칭을 통해서 세를 더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1912년 레닌은 스탈린을 볼셰비키 중앙위원으로 위촉했다.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는 데에 조지아 출신의 스탈린이 도움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볼셰비키 주간지 즈베즈다(별)를 일간지 프라우다(진실)로 전환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스탈린은 본래 갖고 있던 이오시프 주가시빌리라는 이름 대신에 강철인이라는 뜻의 러시아어 필명 ‘스탈린’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22년 레닌은 뇌졸중 후 병석에 눕게 되었는데 스탈린의 국정운영 방식을 우려하여 스탈린을 당 서기장에서 해임시켜야 한다는 뜻을 문서로 남겼다. 1923년 레닌이 병석에 있는 동안 스탈린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함께 3두 체제를 형성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좌파적 성향이라는 점에서 트로츠키와 이념적으로 유사했다. 하지만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트로츠키의 좌파야권을 분파주의적이라고 비판했고, 이에 트로츠키 역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등의 과오를 지적했다. 1925년 트로츠키는 군사인민위원에서 결국 해임당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트로츠키를 당에서도 제명하려 시도했을 때 스탈린은 이에 반대했다.

트로츠키 세력이 약화한 후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스탈린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트로츠키와 함께 반(反)스탈린 전선을 구축했다. 1926년 초 트로츠키의 좌파야권 그리고 지노비예프·카메네프의 신야권이 야권연대를 결성했다. 이 연대에는 레닌의 미망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가 참가한 적도 있다. 야권연대는 당내 언론자유와 탈관료주의를 주장했다.

이에 중도적 위치의 스탈린은 부하린의 우파와 연대하여 다수 세력을 확보했고, 1927년 11월 12일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를 공산당에서 제명했다. 트로츠키가 스탈린에게 계속 항거한 반면에,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스탈린에게 복종하는 태도를 보여 공산당에 다시 입당할 수 있었다. 주요 좌파 지도자들이 제거된 이후인 1929년 스탈린은 자신에게 복종하는 좌파와 연대하여 부하린 등의 우파를 축출했다.

1인 지배 체제를 구축한 이후 스탈린은 개인숭배에 의한 장기 지배를 모색했다. 1929년 12월 생일을 맞은 스탈린은 출생연도를 1878년에서 1879년으로 바꾸어 탄생 50주년 축하 행사를 풍성하게 가졌다. 이를 시작으로 개인숭배 사업이 줄줄이 이어졌다.

또 스탈린은 공포 정치에 의한 장기 지배의 길로 들어섰다. 독재자일수록 권좌에서 물러났을 때의 상황을 의식하여 무리해서라도 더욱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스탈린은 경제정책 실패로 나빠진 민심이 권력 교체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대안이 될 만한 잠재적 경쟁자를 모두 제거했다. 1936년 이른바 1차 모스크바 공개 재판에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등 16인의 볼셰비키 혁명 동지들이 숙청되었다. 1938년 이른바 3차 모스크바 공개 재판에서는 부하린 등 21인의 동지들도 숙청했다. 모스크바 재판의 증거는 대부분 조작된 것이었다. 심지어 망명 중인 트로츠키마저 1940년 멕시코에서 암살되고 말았다. 부하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은 50년이 지난 1988년에서야 복권됐다.

스탈린이 레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인 지배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자신이 다수 승리연합을 이끌 수 있도록 일련의 연대를 지속적으로 도모했기 때문이다. 승리 이후에는 자기 몫을 극대화하기 위해 승리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파트너의 숙청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처럼 연대를 쉽게 결성하고 쉽게 깨려면 이념적 입장을 유연하게 가져야 한다.

대외정책에서도 이념적 유연성 관철  

1949년 12월 18일 중국 공산당원들이 스탈린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며 행진하고 있다.

1949년 12월 18일 중국 공산당원들이 스탈린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며 행진하고 있다.

스탈린의 이념적 유연성은 국내정치뿐 아니라 대외정책에서도 관찰된다. 영구혁명론 대신에 일국사회주의를 내세워 서유럽 사회주의 혁명세력을 지원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서유럽 국가들로부터 국가승인을 얻을 수 있었다. 파시스트들이 소련을 공격하려는 위기 속에서는 독일-소련 불가침조약을 맺어 공격의 우선 대상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또 중국 공산당에게는 반(反)일본제국 연합전선인 국공합작을 권고하기도 했다. 모두 이념보다 생존을 우선시하는 행보였다. 상황에 따라 적과도 연대할 정도로 스탈린의 이념적 위치는 유동적이었다.

1982년 안드로포프 역시 당내 이념 분포에 있어 중간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연대 파트너의 선택에 제한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당 서기장으로 무난히 선출될 수 있었다. 물론 중간적이거나 유동적 위치라고 해서 늘 다수 승리연합을 주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탈린과 안드로포프 모두 자신의 조직을 확실하게 관리했다. 사적 혜택을 제공하고 대신에 충성으로 돌려받는 관계가 지속되는 지배연합을 유지했다.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등은 모두 당대 발군의 이론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권모술수 행동에서 스탈린을 따라가지 못해 경쟁에서 패배한 후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스탈린의 1인 장기 지배 체제는 중국과 북한에도 모델이 되어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1인 장기 지배 체제를 가능케 하였다. 심지어 공산주의와 경쟁하는 체제에서도 1인 권력 집중을 가능하게 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권력 장악이 그런 예이다.

오늘날 1인 장기 지배 체제는 흔하지 않다. 개방된 체제에서 1인 지배 체제는 오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1인 장기 지배를 추구하는 지도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대한민국의 주변국에는 일당 독재에 기반을 둔 1인자들이 있다. 그런 1인자 등극 현상은 서로 맞물려 있기도 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유력한 차기 지도자로 꼽혔던 쑨정차이를 부패 혐의로 낙마시킨 후 장기 지배의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한다. 지난 10월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아베 신조 총리의 자민당이 크게 승리한 데에는 분명히 북한 덕도 있다고 아소 다로 부총리가 발언한 바 있는데, 아마 중국까지 포함하여 생각했을 것이다. 북한·중국·러시아·미국·일본 등의 강한 지도자 등장은 서로 궤를 함께하고 있다.

100주년을 맞은 볼셰비키 혁명은 오늘날 북한과 중국, 심지어 러시아에서조차 별로 기념되지 않는다. 볼셰비키 혁명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촛불집회조차 잘 보도되지 않는다. 대신에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이, 러시아에서는 스탈린이 다시 기념되고 있을 뿐이다. 개인숭배가 집권자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유럽에 유령이 나타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1848년 공산당선언 첫 구절) 대신에 오늘날 동북아시아에는 스탈린 유령이 배회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동북아시아의 일부 권력자들이 스탈린의 공포 정치를 벤치마킹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1930년대 소련 사회와 전혀 다른 오늘날에 스탈린식 숙청 방식이 지속적으로 통하기는 어렵다. 물론 다수의 세력을 결집하려는 스탈린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수 승리연합을 주도하기 위해 여러 차원의 연대를 모색하는 과정은 스탈린을 포함한 권력자가 보편적으로 행하는 방식이다. 다만, 강한 패권 경쟁자의 연대뿐 아니라 약한 생존 경쟁자의 줄서기에서도 몇 수 내다보기가 필요하다.

김재한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 내셔널 펠로. 2010년 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 현상의 수리적 분석에 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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