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본받아야 할 GE의 'CEO 사관학교' 6년 과정이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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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제너럴일렉트릭(GE) 이사회 산하 ‘경영 발전 보상 위원회’(MDCC)는 차기 최고경영자(CEO) 선정 작업에 착수했다. 제프리 이멜트(61) 당시 CEO의 후계자로 누구를 뽑느냐는 것이었다.

이사회에서 6년간 CEO 후보 육성ㆍ경쟁시키면서 평가 # 임기 보장해 강도 높은 혁신과 과감한 투자 가능 # 낙하산 인사, 정치 외압 많은 한국 기업 참고해야

이사회는 차기 CEO가 갖춰야 할 리더십 기준을 정한 뒤 회사 내외부에서 후보 20여명을 추렸다. 그리고 후보자들이 사업 및 부서를 이끈 경험과 성과, 리더십 역량, 상사와 동료ㆍ부하들의 평가 등을 종합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또 이들을 해외로 발령내거나 경쟁이 심한 시장을 맡게 하는 식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면서 리더십을 검증했다.

이사회는 2016년에 최종 후보 4명을 추렸고, 이멜트 CEO는 이들을 수시로 만나며 1대1 리더십 지도에 나섰다. 이어 지난 6월 이멜트 CEO와 이사회는 존 플래너리(55)를 10대 회장 겸 CEO로 선임했다.

후계자를 선발하는 데에만 6년 이상의 검증을 거친 셈이다. 플래너리 CEO는 1987년 GE에 입사한 이후 경력의 절반을 해외에서 보냈다. GE헬스케어ㆍGE인도 등을 이끌었고, GE 역사상 최대 인수ㆍ합병이었던 알스톰의 에너지 사업부를 인수하면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다.

이멜트 역시 플래너리와 같은 방식으로 CEO 자리에 올랐다. 이멜트의 전임 CEO였던 잭 웰치와 당시 이사회는 1994년 23명의 후보자를 확정한 후 1998년 후보자를 3명으로 압축했다. 이들에게 2년간 주요 사업부의 대표를 맡겨 능력을 평가했고, 최종적으로 이멜트를 선택했다. 이런 치밀한 경영권 승계 시스템 때문에 GE는 ‘CEO 사관학교’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GE의 CEO 선임과정에 참여한 수잔 피터스 HR 총괄은 “GE는 미래 변화를 이끌 차세대 지도자를 선정하는 데 있어, 그 어떤 그룹보다 공들여 준비하고 오랜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는 얘기”고 말했다. 이 밖에도 GE는 젊은 사원들을 미래를 이끌 리더로 키우기 위해 ▶인재개발과 육성 ▶직원들의 성과 평가 ▶개인의 역량 개발 ▶피드백 강화 등에 매년 1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고 있다.

5일 블룸버그ㆍ포브스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창사 125년을 맞은 장수기업 GE를 이끌어온 CEO들은 신임 플래너리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총 9명이다. 이들의 평균 임기는 13.9년으로 S&P 500대 기업 CEO 평균 재임 기간(8.8년)보다 훨씬 길다. 철저한 검증을 거쳐 선정한만큼 한 번 정한 ‘수장’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런 경영의 연속성은 강도 높은 혁신과 과감한 투자로 이어질 수 있었다. 실제 GE는 거대 글로벌 제조기업에서 소프트웨어 기반의 디지털 회사로 변신에 성공했다. 1896년 미국 다우존스 산업지수에 포함된 12개 상장 기업 중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애플ㆍ마이크로소프트ㆍP&GㆍIBMㆍ콜게이트파몰리브 등도 GE와 비슷한 경영권 승계 시스템을 갖춘 기업으로 꼽힌다. 젊은 인재를 찾아내 지속적으로 육성ㆍ경쟁시키면서 CEO감으로 키운다. 탁월한 인재와 리더가 회사의 성장을 이끌고 문화를 만들어 간다고 믿기 때문에 일찌감치 공을 들이는 것이다.

이런 경영권 승계 문화는 한국 재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기업이었다가 민영화된 일부 기업과 최대 주주가 없는 금융회사 등은 CEO 선임 때마다 낙하산 인사, 정치 외압 등으로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급조한 추천위원회가 길어봤자 두세달 만에 CEO를 뽑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기업들은 사주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별도의 시스템보다는 사주의 ‘마음’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 이런 기업 문화에서 사전에 후계자를 선발하고 체계적으로 양성ㆍ검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김상현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GE 등에서 이뤄지는 CEO 승계 시스템은 단순히 권한만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면면히 이어져 온 기업문화ㆍ경영 노하우 같은 무형자산을 후계자에게 전수하는 중요한 프로세스”라며 “임기를 보장받은 CEO는 전문성ㆍ효율성을 극대화하면서 중장기 전략수립이 가능하기 때문에 지속 가능한 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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