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분열의 시대, 손상된 ‘세계에 대한 신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55호 22면

빠른 삶, 느린 생각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뉴스를 보면 천재지변, 그리고 국내외의 정치 분규 같은 어지러운 일들이 끊임없다. 지진, 폭풍우, 홍수, 꺼지지 않는 산불. 이러한 일들이 사람에 의한 자연 환경의 손상과 관계있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은 더욱 산란해진다. 사람이 저지르는 험악한 일들은 물론 테러리즘·폭력·살인·음모·사기 등의 사건에서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미국·유럽 극우파 인종차별에서 #테러리즘, 북 핵개발 등의 문제는 #보편성 외면한 극단주의의 산물 #공동체 근간인 인도주의 흔들어

특히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좁은 시각의 정치 프로그램들이 세를 넓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이나 집단의 협량한 이해관계가 정치를 움직이고, 목적이나 구도가 분명치 않는 정치 움직임이 두드져 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일반적 정치이론, 역사이론들이 위신을 상실했다는 사실에 관계될 수도 있다. 정치 열정은 보편주의와 부분적 집단주의 사이를 주기적으로 오고 가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세계 정치의 흐름에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신비한 주기가 있는 것일까?

정치의 한 어려움은 큰 목적을 작은 행동들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 내야 한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때로는 부당한 수단-적어도 강제력의 사용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과의 결합을 필요로 한다. 이 어려움과 모순을 완화시켜주는 것은 궁극적으로 평천하(平天下), 편한 세상을 오게 한다는 비전이다. 이러한 비전 또는 이상이라는 것도 허망한 것일 수 있고, 위선일 수도 있다. 그러나 헛된 믿음도 마음을 달래 주고, 사실 평가의 기준이 되고, 정치 현실을 이끌어 가는 지표가 될 수 있다. 20세기 프랑스 한 철학자의 말에 ‘세계에 대한 신뢰’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서의 시(詩)가 가질 수 았는 의의를 두고 한 말이지만,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세상의 근본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에 전해 오는 정치 뉴스들을 보면, 많은 정치 과정들은 어떤 이상적 결론에 이르고자 하는 것인지 짐작하기 쉽지 않다. 그리하여 사람이 가져야 하는 ‘세계에 대한 신뢰’를 손상하는 결과를 낳는다.

오늘날 여러 나라에서는 국수주의 또는 부분적 집단의 입장을 강화하려는 정치 그룹이 크게 부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독일이나 프랑스의 경우가 그렇고 영국의 브렉시트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오스트리아 총리가 유력시되는 제바스티안 쿠르츠는 32세라는 젊은 나이 때문에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는데, 그가 이끄는 국민당이 표방하는 정치 이념들은 배타적 국수주의를 표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입장을 자극하는 중요한 원인은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밀려오는 이민 문제다. 이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 이외에는 이 문제가 보편적 인간주의의 관점에서 풀어야 할 과제라는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개방적 이민 정책은 독일의 경제적 필요와 관련되기도 하지만, 이민에 대한 포괄적 인도주의를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 그에 반대하는 입장들은 이민자의 입국 저지가 국익(國益)이라는 것 이외에는 다른 대책이 없다. 지난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상당수의 표를 얻은 ‘독일대안(代案)당(AfD)’은 반이민·반이슬람·반다문화(反多文化)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독일의 나치 과거를 강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보편적 인도주의가 국가의 기본 이념이 되어 본 일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없이는 인간적인 공동체가 성립할 수는 없다. 이 보편주의는 사회 내의 문제에 대한 윤리적 고려에서도 중요한 기능을 한다.

미국 전 대통령들, 분열 극복을 역설

미국에서 크게 뉴스가 된 것은 다섯 전직 대통령이 함께 텍사스 주의 한 대학에서 열린 콘서트에 참석한 일이다. 이 콘서트는 텍사스와 플로리다 주 그리고 푸에르토리코와 버진아일랜드의 폭풍 피해자를 돕기 위해 모금하려는 목적으로 열렸다. 콘서트의 이름은 ‘깊은 마음으로부터: 하나의 아메리카 단합 호소 콘서트(Deep from the Heart: One America Appeal Concert)’였다. 이 제목의 아메리카 단합 운동은 9월 초에 이미 시작된 것이었고, 그것은 주로 푸에르토리코 폭풍 피해 구조를 위한 것이었다. 이 운동이 시작된 것은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대책이 지연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푸에르토리코에 일어난 거대한 폭풍우 피해에 대하여 구호 대책을 내놓는 대신에 지방정부의 여러 실책을 비판하는 의견을 내어 놓았었다. 그것은 지방정부의 무능과 실책에 대하여 중앙정부가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전직 대통령들이 참가한 콘서트 이후 그는 새로운 대책을 발표하였다.) 푸에르토리코는 법적으로 미국의 자치령이지만, 주민은 미국의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마땅히 정부의 구호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도 요청되는 일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느린 반응은 그의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인한 것이라고 비판적 여론은 말한다. ‘아메리카 제일주의’가 그가 내세운 정책 지표인데, 이것은 사실적으로는 다른 인종을 혐오하는 ‘백인 제일주의’를 의미한다고 이야기된다. 그의 반이민정책도 이러한 인종주의에서 나온다는 분석들이 있다.

지난 19일 열린 다른 집회에서 버락 오바마, 조지 W 부시 두 전 대통령이 행한 연설은, 직접적으로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제일주의의 편협함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의 세계에 퍼지고 있는 정치 흐름의 모습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연설에서, 지금 미국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분열의 정치’이고 ‘공포의 정치’라고 말하였다. 유색인종 차별을 보여 주는 이민정책, 파리 환경조약 탈퇴, 이란과의 핵 협정 파기와 같은 것이 그러한 정치의 현실적 표현이다.

같은 날 다른 모임에서는 부시 전 대통령의 ‘자유의 정신: 국내외의 상황’이라는 주제의 연설이 있었다. 그것은 대체로는 흔히 들을 수 있는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을 옹호하는 내용이었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미국의 정치상황은 이것을 부정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지금에 와서 정치 토론은 곧 극단적인 적대적 대결이 되고 그 동기가 되는 것은 불만과 편견과 음모다. 필요한 것은 미국의 이상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인종이나 출신지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은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미국이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이상들은 국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즐라브 하벨이 자신의 나라에서 실현하고자 하였던 것도 같은 자유의 이념이었다.

이 전임 대통령들 자신도 참으로 이러한 정치 편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지적하려는 것은 정치의 좁아져 가는 집단 이기주의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현재의 정치 현실의 실상을 새삼스럽게 드러내 준다는 점이다.

우리 정치도 긍정적 비전 보여줘야

세상에 대한 우리의 느낌을 가장 어둡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북한의 핵개발 계획이다. 핵폭탄은 그 자체로 인간의 미래 전망을 절망적인 것이 되게 한다. 그것이 많은 나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핵확산금지조약에 동의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북핵 개발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강대국에 포위되어 있다는 북측의 판단은 그에 대항하는 무력의 확보가 있어야 한다는 추론으로 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북의 발언에는 ‘불바다’를 만들겠다는 폭력 의지의 과시 이외에 그것을 넘어 균형과 평화의 확보가 목표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 모스크바 핵비확산회의에 온 북의 최선희 외무성 국장이 미국의 도발이 없는 한 핵무기 사용이 없을 것이라고 발언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비로소 무력 과시를 넘어 핵무장의 더 넓은 의도를 비춘 것이다. 다만 동기가 미국의 도발에 있다는 말은 반드시 사실성과 평형을 갖춘 발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정도의 발언도 좀 더 합리적인 관점에 접근해 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아마 유엔 안보리 제재 조치의 효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눈을 우리 주변으로 돌려, 북핵의 문제와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지만, 우리 정치에 빈번한 부정의 논리에도 긍정적 포괄적 목표와 이상의 배경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적폐청산만 해도 청산하여야 할 폐단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한두 가지 행정 조처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일까? 배경에 있는 국가의 이상은 어떤 것일까?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어떤 비전이 있는 것일까?

정치가 사람에게 완전한 행복을 보장할 수는 없다. 정치는 대부분의 경우 차선(次善) 또는 필요악(必要惡)에 불과하다. 옛날에 동아시아에서 변함없는 평화의 질서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자연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혼란한 정치로부터 산수와 전원(田園)으로 돌아갔다. 단풍도 사람들에게 큰 기쁨의 사연이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단풍을 보기 위하여 산을 찾는다. 당(唐)나라의 시인 두목(杜牧)의 시 한편을 풀어 소개하면서, 글을 끝내기로 한다. 먼 산길을 올라가다 흰 구름이 이는 곳에 이르니 거기에도 인가가 있다. 수레를 멈추고 저녁 햇빛이 비치는 단풍의 숲을 본다. ‘서리 맞은 잎들이 이월의 꽃보다 붉어 있구나(霜葉紅於二月花).’ 그는 이렇게 감탄을 표한다. ‘산행(山行)’이라는 시다.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지만, 조락(凋落)의 계절이기도 하다. 단풍은 아름다우면서도 조락의 표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믿을 수 있는 계절의 순환, 믿을 수 있는 세계의 질서이다. 사람의 삶은 이 큰 질서 속에 포용된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척도』『심미적 이성의 탐구』『자유와 인간적인 삶』『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