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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만찬엔 한식? 프랑스식 12코스 요리 냈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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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호 24면

[FOCUS] 대한제국 120주년, 잊혀진 황실 연회 음식 첫 재현

새롭게 재현한 대한제국 황실 연회음식 상차림. 이베이에서 구입한 19세기 음식 그림책(가운데)도 큰 도움이 됐다.

새롭게 재현한 대한제국 황실 연회음식 상차림. 이베이에서 구입한 19세기 음식 그림책(가운데)도 큰 도움이 됐다.

이번 재현행사를 위해 황실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 박힌 식기도 새로 제작했다.

이번 재현행사를 위해 황실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 박힌 식기도 새로 제작했다.

조선의 국왕이던 고종이 대한제국 광무황제가 된 것이 1897년 10월 12일. 각국의 공사관이 건립되고 외국인들의 발걸음도 잦아지면서 황실에서 이들을 초청해 벌이는 연회도 늘어났다. 하지만 어떤 요리가 어떻게 제공됐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려웠다.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맞은 올해,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문화재청(청장 김종진)·신세계조선호텔(대표 성영목)·배화여대(총장 김숙자)가 문화재지킴이 민·관·산·학 협력 차원에서 주목한 부분은 바로 황실의 잊혀진 연회 음식이었다.

독일 여성이 남긴 유일한 만찬 메뉴로 재구성 

각종 자료를 참고해 요리로 만들어낸 유재덕 셰프(왼쪽에서 두 번째)와 신세계조선호텔 조리팀

각종 자료를 참고해 요리로 만들어낸 유재덕 셰프(왼쪽에서 두 번째)와 신세계조선호텔 조리팀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 역사관에 세팅된 모습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 역사관에 세팅된 모습

11일 오전 서울 소공동 신세계조선호텔 2층 연회장. 가을비가 그친 청명한 공기 너머로 팔각지붕 건물 황궁우(皇穹宇)가 보였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환구단(圜丘壇·혹은 원구단)의 남은 흔적이다. 고려말 이후 폐지와 설치가 거듭되던 환구단을 1897년 다시 건립한 고종은 바로 이곳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일제는 1913년 환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현 신세계조선호텔)을 지었는데, 그 역사의 현장에서 ‘대한제국 황실 서양식 연회음식 재현’ 행사가 열린 것이다.

지난 5월부터 학술연구를 진행해온 손정우 배화여대 교수(전통조리과)가 이날 첫 번째로 마이크를 잡았다. “대한제국은 궁중 음식을 잇는 마지막 계보이자 서양 음식이 유입되는 시초로, 우리나라 음식 문화의 분수령이 되는 시기입니다. 황제의 전속 조리인이었던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을 비롯해 중국인 주방장, 30여 명의 궁내부 조리사들이 요리를 담당했지요. 하지만 손탁은 자료를 전혀 남기지 않아 음식 재현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각종 견문록과 사료, 옛 신문과 논문, 국내외 박물관 소장자료를 꼼꼼하게 뒤진 연구진에게 가장 힘이 된 사람은 독일인 엠마 크뢰벨(Emma Kroebel·1872~1945)이었다. 남편을 따라 중국 칭다오에 왔다가 손탁의 초청으로 1905년 여름 한성을 방문한 크뢰벨은 휴가를 떠난 손탁을 대신해 1906년 가을까지 1년간 궁중 의전담당관 역할을 했다. 그는 독일로 돌아가 『나는 어떻게 조선 황실에 오게 되었나』(2015년 번역)를 썼는데, 이 책에 1905년 9월 19일 이토 히로부미를 맞으며 준비한 만찬 메뉴표의 사진을 수록해 놓았던 것. 손 교수는 “이 유일한 황실 연회 메뉴를 중심으로 1895년 명성황후를 알현하고 음식을 대접받은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의 설명, 독일 장교 헤르만 산더가 갖고 있던 일본 공사관의 1906년 메뉴 3점 등을 참고해 메뉴를 구성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황실 연회용 요리는 프랑스식 정찬에 기반했다. 유럽에서는 왕이 베푸는 공식 연회에는 반드시 프랑스 요리가 나왔다. 1885년부터 1909년까지 24년간 머물며 궁내부 서양 의전 전례관으로 활약한 손탁 역시 프랑스 알자스 로렌 출신이다. 크뢰벨은 이렇게 전한다. “황궁의 식사 예절은 유럽 중에서도 특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공식 만찬에서는 현대식으로 정선된 식탁 위에 엄선된 프랑스 요리가 오른다. 송로버섯 구이와 굴, 캐비어 등은 흔한 요리에 속하며, 프랑스 샴페인은 본고장의 유사한 행사에서보다 더 풍성하게 제공된다. 마치 유럽의 제후 궁정에 초대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한국 황제는 만찬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관례다.”

이베이 경매 통해 19세기 요리 그림책도 확보 

왼쪽부터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김숙자 배화여대 총장, 김종진 문화재청장, 성영목 신세계조선호텔 대표, 조형학 신세계조선호텔 상무, 이용호 신세계조선호텔 지원총괄 부사장.

왼쪽부터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김숙자 배화여대 총장, 김종진 문화재청장, 성영목 신세계조선호텔 대표, 조형학 신세계조선호텔 상무, 이용호 신세계조선호텔 지원총괄 부사장.

프랑스식 정찬이라는 얘기에 깜짝 놀란 사람은 25년 경력의 유재덕 신세계조선호텔 메뉴개발팀 주방장이었다. 그는 “1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황실 연회 음식을 재현한다기에 한식이나 한식에 서양식을 결합한 메뉴겠거니 생각했다”며 “레시피도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개발하고 또 요리할 것인지 정말 고민이 컸다”고 털어놓았다. 그런 그에게 “손탁이 알자스 로렌 출신이니 그것을 감안해 1890년대 프랑스 연회 사진과 정찬 요리법을 참조하라”는 르 꼬르동 블루-숙명 아카데미의 조르주 링가이젠 셰프 요리장의 조언은 금과옥조였다.

행운도 따랐다. 지난 여름 우연히 이베이 경매사이트에서 영국의 저널리스트 이사벨라 비튼의 『북 오브 하우스홀드 매니지먼트』(1861)라는 귀한 책을 발견하고 적지 않은 개인 경비까지 들여가며 응찰한 끝에 어렵사리 낙찰받았던 것. “무엇보다 음식 그림이 많아 큰 도움이 됐다. 아무래도 고종 황제가 하늘에서 도와준 것 같다”며 활짝 웃은 유 셰프는 “앞으로 이 메뉴를 ‘황제의 식탁’ 컨셉트로 발전시켜 호텔 연회장에서 계속 선보이고 싶다”며 포부를 밝혔다.

2006년부터 문화재청과 협약을 맺고 덕수궁 석조전 내 대한제국 역사관의 침구과 카펫 등을 매달 세척하는 등 다양한 문화재지킴이 활동에 나서고 있는 신세계조선호텔의 성영목 대표는 “올해 개관 103주년을 맞은 국내 최고(最古)의 호텔로서 앞으로도 전통문화유산 보전과 계승에 적극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은 “대한제국이 얼마나 품격있는 나라였는지 이번 행사를 통해 느꼈으면 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에 재현한 황실 만찬 메뉴는 정통 프랑스식 12코스다. 황실에서 모든 메뉴는 기본적으로 큰 접시에 담아 나왔으며, 손님에게 보여드린 후 잘라 각각 개인 접시에 나눠 서빙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샴페인·와인·맥주 등과 함께 보통 3시간 이상 즐겼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각종 빵틀과 아이스크림 기계를 참고했다. 식기 역시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 무늬(李花紋)로 장식한 프랑스 도자기 리모주(Limoges) 등을 참조해 8인분 세트를 새로 만들어 상을 차렸다. 다음은 유 셰프가 말하는 12코스의 특징.

1. 크넬을 곁들인 콩소메: 크넬은 고기 완자다. 콩소메는 고기와 채소를 푹 고아 진하게 우려낸 후 맑게 걸러낸 고급 수프다.

2. 구운 생선과 버섯 요리: 에피타이저. 서양인도 즐겨 먹는 대구를 골랐다.

3. 꿩 가슴살 포도요리: 첫 번째 전식. 당시 꿩 사냥이 성했다. 오븐에서 구워낸 꿩에 절인 포도로 만든 소스를 뿌렸다.

4. 푸아그라 파테: 두 번째 전식. 파테는 페이스트리 반죽으로 만든 파이에 고기·생선·채소 등을 갈아 만든 소를 채운 후 오븐에 구운 요리다. 이 거위 간 요리는 이스라엘에서 유럽으로 넘어온 유대인에 의해 발전했는데, 프랑스 알자스 지역이 유명했다. 당시 통조림으로도 가공돼 수입됐다. 만드는데 이틀 정도 걸린다.

5. 안심 송로버섯 구이: 첫 번째 메인. 조선시대에는 쇠고기가 귀했다. 평민들은 개고기를 즐겼다. 송로버섯도 세계 3대 식재료다.

6. 아스파라거스와 홀란데이즈 소스

7. 양고기 로스트: 두 번째 메인. 조선시대에는 양을 거의 사육하지 않았지만 철도 개통으로 다양한 식재료가 수입됐다. 양고기를 마늘과 호프에 절여서 오븐에서 3시간 이상 구워낸다.

8. 샐러드

9. 치즈: 당시 조선에서는 낙농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치즈와 버터는 일찍부터 유럽 방식으로 생산을 시작한 일본 삿포로에서 수입했다.

10. 파인애플 아이스크림: 수동 기계로 만든 셔베트.

11. 디저트와 커피: 디저트 3종(샤를로트 루스·젤리 케이크·를리지외즈)과 각설탕은 식사 전 테이블에 세팅했다. 꽃과 함께 미리 디저트를 놓은 것은 식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한반도에서는 설탕이 나지 않아 단맛은 꿀이나 물엿으로 냈다. 각설탕을 수북하게 쌓은 이유는 귀한 식재료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12. 식후주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문화재청·신세계조선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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