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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세]국민 100명 중 1명이 갱단…엘살바도르에 희망은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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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국제부 기사를 눈여겨 봐오셨던 분들이라면멕시코가 왜 '범죄 천국'이라 불리게 됐는지, 마약 배송에 잠수함까지 동원하는 중남미 마약 카르텔의 실체는 어떤 것인지 읽어보셨을 텐데요.

인구 10만명당 104명 살해당해 #'세계서 살인율 가장 높은 국가' 오명 #젊은이들, 생계 위해 조직 범죄 가담 #국민 600만 명, 범죄 조직원은 6만 명 #수도 산살바도르 취임한 30대 젊은 시장 #"조직 범죄 억압은 해결책 아니다" #젊은이들 위한 문화 시설 대거 투자해 #1년만에 범죄율 16% 낮춰

그러나 중남미 최악의 범죄 국가라 불리는 곳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 살인율이 높은 국가 엘살바도르입니다. 특히 수도 산살바도르는 이 나라의 범죄 대부분이 벌어지는 도시로 악명이 높은데요. [고보면 모있는 기한 계뉴스] 오늘은 '세계의 살인 수도'로 불리는 산살바도르의 참혹한 실상과 이곳에 혜성처럼 등장한 36세 젊은 시장의 이야기입니다.

엘살바도르는 스페인어로 구세주(salvador)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과 달리 엘살바도르 국민들은 신조차 외면한 듯이 처절한 환경 속에 살고 있습니다. 지난 2015년 엘살바도르는 인구 10만명당 104명이 살해당해 세계에서 가장 살인율이 높은 국가로 기록됐습니다. 2015년 8월엔 한 달 동안에만 무려 900명이 살해당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는데요. 지난 1월 12일엔 2년 만에 처음으로 단 한명도 살해당하지 않아 전 세계에서 뉴스가 되기도 했을 정도예요.

이처럼 높은 살인율은 대부분 엘살바도르의 조직 범죄단에 의한 것인데요. 가장 큰 두 조직 마라 살바트루차(MS-13)와 바리오18의 조직원 수는 도합 6만 명에 달한다고 해요. 나라 전체 인구가 600만 안팎이니 100명 중 한 명은 조직원인 셈이죠. 이들의 성장세는 현지 경찰이 "조직원을 아무리 잡아들여도 충원되는 속도가 더 빠르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감옥에 수감돼 있는 엘살바도르 조직 범죄원들. [뉴욕타임스]

감옥에 수감돼 있는 엘살바도르 조직 범죄원들. [뉴욕타임스]

특이하게도 엘살바도르의 조직 범죄단은 마약 거래 같은 국제 범죄에 거의 손을 대지 않습니다. 돈도 별로 없어요.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MS-13의 연간 소득은 우리 돈으로 355억원 남짓. 마약으로 수십조 원을 벌어들이는 멕시코 조직 범죄단이 보기엔 하찮은 액수죠. 이들의 주된 범죄는 동네 주민들에게 강제로 돈을 뜯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벌어봐야 조직원 1인당 수입은 한 달 60달러(7만원)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엘살바도르 조직 범죄단의 지역 장악력은 다른 그 어떤 나라의 조직보다도 막강합니다. 이를 잘 보여준 사태가 지난해 4월 벌어졌던 버스 테러 사건입니다. 조직 범죄단 MS-13은 감옥에 있던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최고보안 감옥으로 이감되자 이에 반발해 산살바도르 전체에 이동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이들이 금지령을 어기고 운행하는 버스 기사들을 무자비하게 사살하면서 이날 시민들의 발이 묶여 도시 전체가 마비됐죠.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어디 변두리가 아니라 수도 중심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엘살바도르는 왜 조직 범죄의 온상이 됐나

멕시코 남쪽, 과테말라와 온두라스 사이에 위치한 소국 엘살바도르의 갈등은 1980년대 우파 군사독재 정권과 좌파 반정부 세력 간의 내전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1992년 유엔의 중재로 내전이 종식될 때까지 10여 년에 걸쳐 7만5000명이 사망하고 백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피난을 떠나는 참상이 벌어졌죠. 92년 평화협정으로 엘살바도르는 평화를 되찾은 듯했습니다. 당시 테리 칼 스탠포드대 교수는 이 협정을 "협상을 통한 혁명"이라며 극찬할 정도였어요.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역량이 안 되는 정부가 정치로 다스리기엔 나라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혈사태가 끝나자 엘살바도르 각지에서 조직 범죄단의 폭력 범죄가 활개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내전으로 무기가 널리 보급돼 있었던 탓에 지역 조직의 일개 단원들조차 자동화기로 무장하고 세력 다툼을 벌였다고 합니다. 우파 정부는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철권(mano dura) 통치를 선언했습니다. 서서히 법을 개정하며 공권력을 강화해나가기 시작한 거죠.

2009년 엘살바도르에선 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좌파 정권이 집권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질 않았습니다. 정권을 잡은 좌파 정당 자유해방전선(FMLN)은 지지율 상승을 노리고 조직 범죄를 강력하게 단속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조직들이 서로 협력해 정부에 맞서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제2의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 엘살바도르의 현실입니다.

엘살바도르에서 정부의 강력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조직 범죄가 활개를 치는 것은 나라 경제·사회가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과거 엘살바도르 경제의 핵심 동력이던 커피 농업의 근간이 내전으로 인해 파괴됐습니다. 유엔개발계획(UNDP)에 따르면 엘살바도르 국내총생산(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3년 10% 미만으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현재 엘살바도르 주민들 대다수는 자족 능력을 상실하고 미국 등 해외에 불법 체류하는 가족의 수입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어요.

산업이 피폐해져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에겐 선택의 폭이 거의 없습니다. 합법적으로 돈을 벌어서 생계를 유지할 수단이 사실상 없기 때문입니다. 독일 국제지역연구소의 자비네 쿠르텐바흐 선임연구원에 따르면 엘살바도르의 소년들은 불법 이민과 조직 범죄단 가입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소녀들은 범죄 조직에 성 노예로 팔려가는 일이 빈번하고요. 엘살바도르 정부가 이 같은 현실은 도외시한 채 조직 범죄단 소탕에만 열중하고 있어 사태를 더 심각하게 만든다고 쿠르텐바흐는 지적합니다.

나라에 새 바람 불어넣는 34세의 젊은 정치인

나이브 부켈레(36) 산살바도르 시장. [산살바도르시]

나이브 부켈레(36) 산살바도르 시장. [산살바도르시]

이처럼 끝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던 엘살바도르에 한 젊은 정치인이 새 바람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바로 지난 2015년 34세의 나이로 수도 산살바도르 시장에 취임한 나이브 부켈레가 그 주인공입니다. 사업가 출신인 부켈레는 그동안 조직 범죄 소탕에 나섰다가 분쟁을 악화시킨 전임 시장들과 달리 인프라 확충, 청소년 교육·복지 강화 등의 정책으로 1년만에 산살바도르의 범죄율을 16% 가까이 낮춰 화제를 모았습니다.

부켈레는 지난 3월 타임지 인터뷰에서 "우리는 조직 범죄와 맞서 싸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힘으로 억누르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젊은이들을 우리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힘쓰겠다"고 말했습니다. 산살바도르의 조직 범죄가 갈 곳 없는 젊은이들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꿰뚫은 발언입니다.

부켈레는 범죄 조직을 억압하는 것이 아스피린과 같아서 증상만 치료할 뿐 근본 원인은 고치지 못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조직 범죄를 뿌리부터 해소하기 위해선 운동장, 도서관, 공원, 시장, 주민센터 등의 인프라를 통해 공동체를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 부켈레의 접근법입니다. 부켈레는 "범죄(criminality)를 창조성(creativity)으로 바꾸겠다"며 스케이드보드, 브레이크댄스, 그래피티 아트 등 젊은이들이 즐기는 문화에 적극 호응하고 있습니다. 지난 7월 산살바도르에서 열린 스케이트보드의 날 행사에 직접 참가해 스케이트보드 공원을 짓겠다고 발표하면서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죠.

산살바도르 시장 나이브 부켈레가 취임 직후 실시한 '하루에 한 가지 일(una obra por dia)' 옷을 입은 노동자들이 장터 건물을 수리하고 있다. [산살바도르시]

산살바도르 시장 나이브 부켈레가 취임 직후 실시한 '하루에 한 가지 일(una obra por dia)' 옷을 입은 노동자들이 장터 건물을 수리하고 있다. [산살바도르시]

부켈레의 성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하루에 한 가지 일(una obra por dia)'이라는 프로젝트입니다. 도시에 매일 하루 한 가지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프로젝트인데요. 부켈레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손상된 도로 복구 작업, 길거리 장터 조성, LED 가로등 설치, 시민 고충 접수하는 스마트폰앱 제작 등 여러 가지 사업을 하루 단위로 진행하며 그날 이뤄진 일들을 사진과 함께 소셜미디어에 게재하고 있습니다. 도시가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을 시민들에게 직접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이 같은 성과에 힘입어 부켈레는 취임 2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산살바도르에서 88%라는 놀라운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명성은 이제 산살바도르를 넘어 엘살바도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죠. 지난달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엘살바도르 전체에서도 46.5%가 부켈레를 차기 대통령으로 지지하겠다고 응답했습니다. 불과 2달 전 25.6%에서 20%포인트 가까이 급등한 것은 물론, 21.8%를 기록한 2위 후보와도 압도적인 차이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제 36세인 부켈레가 진정 엘살바도르의 살바도르(구세주) 같은 정치인으로 성장할 것인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알고보면 쓸모있는 신기한 세계뉴스]는 중앙일보 국제부 기자들이 '몰라도 되지만 알면 더 재미있는' 다양한 세계뉴스를 가져다 각자의 스타일대로 요리해 내놓는 코너입니다.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보시려면 배너를 클릭하세요. 일러스트=신아영 대학생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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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준 기자 forideali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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