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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보는 공공재, 보훈 강화해서 ‘무임승차’ 막아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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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2호 22면

[세상을 바꾼 전략] 오늘은 재향군인의 날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해 2014년 7~11월 영국 런던탑 남문에 전시된 폴 커민스의 설치미술작품. 참전 무명용사의 시 첫 구절인 “피는 대지와 바다를 붉게 휩쓸었고(Blood Swept Lands and Seas of Red)”가 작품 제목이다. 영연방 참전 사망자 수 88만8246에 해당하는 개수만큼의 세라믹 개양귀비꽃으로 장식했다. [위키피디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해 2014년 7~11월 영국 런던탑 남문에 전시된 폴 커민스의 설치미술작품. 참전 무명용사의 시 첫 구절인 “피는 대지와 바다를 붉게 휩쓸었고(Blood Swept Lands and Seas of Red)”가 작품 제목이다. 영연방 참전 사망자 수 88만8246에 해당하는 개수만큼의 세라믹 개양귀비꽃으로 장식했다. [위키피디아]

10월 8일 오늘은 대한민국 재향군인의 날이다. 법정기념일(국가기념일)이지만 법정공휴일은 아니다. 재향군인의 날을 법정공휴일로 기념하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는 미국이다. 재향군인에게만 해당하는 날이라는 의미의 소유격 Veteran’s Day 대신에 재향군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날이라는 의미의 Veterans Day로 미국 정부는 표기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미군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인 퇴역 사병 프랭크 버클스의 2011년 장례식에 현직 대통령과 부통령이 직접 참석할 정도로 미국 사회에서 재향군인은 존중받는다.

과거의 조직 공헌에 대한 보답이자 #미래의 공헌 유도하기 위한 수단 #자유민주국가가 더 추모·존중 #미국은 법정 공휴일, 우린 기념일 #38선 돌파한 날 vs 광복군 창설일 #국군의 날 변경 놓고 티격태격 #오히려 국론 분열의 원심력 작용

미국 재향군인의 날은 매년 11월 11일이다. 그날이 토요일 또는 일요일이면 전날 또는 다음날이 법정공휴일이 된다. 1971~77년 기간에는 10월 네 번째 월요일로 지정되기도 했다. 11월 11일이 미국 재향군인의 날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54년이다. 그 이전은 정전일(Armistice Day)로 부르면서 참전 군인을 존중했다. 1918년 11월 11일 새벽 독일이 콩피에뉴 정전 합의문에 서명했고 그날 오전 11시를 기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것을 기념한 것이다.

11월 11일 정전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 연합국에서 여전히 준수되고 있다. 영국 재향군인회는 매년 10월 말부터 11월 11일까지 개양귀비꽃 4000만 송이를 국민들에게 제공한다. 11월 두 번째 일요일(Remembrance Sunday)에 전사자를 추모하고 11월 11일 11시에 2분간 묵념을 영국 전역에서 실시한다. 묵념 시간은 본래 1분이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분으로 늘었다. 캐나다와 호주 등 영연방국가들뿐 아니라 프랑스와 벨기에 등도 11월 11일에 여러 추모 행사를 거행한다. 자유민주국가들이 전제주의국가들보다 전사자를 더 추모하고 재향군인을 더 존중하려는 이유는 뭘까?

혼자만의 희생 피하려는 경향 있어

1982년 11월 베트남전쟁참전추도식에서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조셉 앰브로스(당시 86세)가 6·25 전쟁에서 전사한 아들 시신의 관을 덮은 성조기를 안고 있다. 2011년 프랭크 버클스가 110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생존 미군은 사라졌다. [위키피디아]

1982년 11월 베트남전쟁참전추도식에서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조셉 앰브로스(당시 86세)가 6·25 전쟁에서 전사한 아들 시신의 관을 덮은 성조기를 안고 있다. 2011년 프랭크 버클스가 110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생존 미군은 사라졌다. [위키피디아]

국가안보 혹은 국가존립은 일종의 공공재다. 그런 공공재는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누군가가 생산의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특히 외국의 침공에 대항하여 참전하는 행위에는 큰 자기희생이 수반된다. 공헌한 사람이나 공헌하지 않은 사람 모두 국가안보나 국가존립과 관련해서는 동일한 혜택을 받기 때문에 자신은 공헌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공헌하기만을 바라는 동기가 발생한다. 만일 남들 다수가 공헌하고 있다면 자신이 빠져도 국가는 여전히 존립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공헌하지 않으려는 유혹을 받는다. 만일 남들 다수가 공헌하지 않는다면 자신만 공헌한다고 해서 국가가 멸망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혼자만의 헛된 희생을 피하려 한다. 즉 남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자신은 무임승차하려 하기 쉽다.

모두가 공헌한 결과인 국가존립은 모두가 무임승차한 결과인 국가멸망보다 모두에게 낫다. 이는 전형적인 공공재 무임승차 문제이고 흔히 죄수딜레마 게임으로 표현된다. 사실 전제주의국가에서는 집단적이고 강제적인 동원이 쉽다. 이에 비해 자유민주국가는 집단적 공공이익을 위해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기가 어렵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집단 중시의 국가보훈 제도가 자유민주국가에서 더욱 더 필요하고 또 발달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보훈은 조직 공헌에 대한 일종의 보답 시스템이다. 과거 행동에 대한 보답(보훈과 보복)은 미래의 공헌을 유도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보훈은 충분한 보상이 아니더라도 과거 공헌에 대한 인정이나 갚음은 있어야 미래의 공헌 가능성이 커진다는 취지다. 그런데 과거 행동에 대한 정리가 말처럼 간단하지는 않다. 보훈이 가장 발달됐다는 미국에서도 보훈의 정착에 긴 세월이 필요했다.

미국의 국가보훈이 본격화하게 된 계기는 1861년에 발발하여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남북 내전이다. 1862년 미국 연방정부는 전몰자를 예우할 국립묘지를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묘지가 부족하자 새로운 장소를 물색했다. 남부군 지도자 로버트 리 가족의 소유지이자 거주지인 알링턴 지역이 그 가운데 하나였다. 내전으로 로버트 리 가족이 알링턴 지역을 비웠을 때 연방의회는 반란지역에서 직접세 징수를 강화하고 땅을 몰수하기 위한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1864년 알링턴 지역은 국방부에 의해 국립묘지가 되었다.

알링턴뿐 아니라 당시의 모든 국립묘지는 북부군만을 위한 장소였다. 내전 종식 후 남부군의 추모는 금지됐다. 남부군은 그냥 반란에 실패한 폭도로 치부됐다. 특히 남부에 대한 관용을 주장하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1865년 남부 출신 배우의 총격으로 사망하자 그 관용은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1877년 로버트 리의 아들 커스티스 리가 알링턴 소유권 반환소송을 냈다. 1882년 연방대법원은 연방정부가 몰수 당시 땅 주인을 대신한 대리인의 세금 납부를 거부했다고 인정하고 커스티스에게 소유권을 반환시켰다. 1883년 연방정부는 커스티스에게 토지대금 15만 달러를 준 후에야 알링턴 묘지 소유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870년대와 1880년대에 이르러 연방 세력의 분열과 함께 연방과 남부 간의 유대가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군인이기 때문에 전투행위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남부군에 대한 동정론도 이 무렵 등장하기 시작했다. 내전 종식 후 2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남부가 미국 연방의 주요 구성원으로 포함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남북 간 정체성 강화는 외부 위협에서 왔다. 외부 위협 때문에 남북이 내전 후 처음으로 성조기 아래 집결(rally around the Flag)하게 됐던 것이다. 1898년 쿠바에서 일련의 사건이 터져 미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벌였다. 수많은 남부 사람들이 미국 연방군의 주축으로 참전했다. 이로써 남북 간의 화합을 위한 각종 행사가 실시됐고 이 때 남부군 내전 전몰자에 대한 연방정부 차원의 예우가 시작됐다.

1900년 남부군 유해를 알링턴 국립묘지에 매장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 연방의회를 통과했고, 1901년 실제 남부군의 매장이 이루어졌다. 남부를 배척하던 상징적 장소가 남부를 포용하기 시작했다. 또 1906년에는 남부군 전몰자 유해를 미국 전역에서 조사하는 법률안도 통과되었다. 남부군 전몰자들은 사망 후 40년이 지나서야 반역자라는 이름표를 떼고 미합중국의 추모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남부군 출신자에 대한 국가보훈 혜택은 거의 100년이 지난 1950년대 후반에 가서야 이뤄졌다. 극소수의 생존자와 유족에게 보훈 혜택을 제공하여 남북 통합의 상징적 효과를 보았다. 물론 최근 로버트 리 동상 등 남부군 상징물의 철거를 두고 전개된 과격한 찬반 시위에서 보듯이, 과거사에 대한 일부의 이견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전쟁으로 통일한 베트남에서도 통일 후 남베트남 군인에게는 북베트남 군인과 달리 보훈 혜택이 제공되지 않았다. 실제 남베트남 군인들 일부는 전쟁 후 처형되었고 수십만은 수용소에서 재교육과 강제노역을 받았다. 호치민의 유훈대로 전면적인 보복과 배척이 없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상황이다.

자신에게 총을 쏜 상대와 통합하기 위해 그 상대를 보훈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당장 실행에 옮기기는 어렵다. 미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6·25전쟁이 누구의 승리로 완결되지 않았고 각종 도발로 60년 이상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한반도 공간에서 남북한을 통합하는 보훈을 당장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자유민주국가들은 보훈 목적의 여러 국가기념일을 지정하고 있다. 11월 정전일을 현충일처럼 기리는 영국은 매년 6월 마지막 토요일을 국군의 날(Armed Forces Day)로 정해 재향군인과 현역군인의 공헌을 치하하고 있다. 다만 영국군의 무력진압으로 수백 명이 사망한 적이 있는 북아일랜드에서는 국군의 날 기념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도 한다. 미국은 재향군인의 날 외에도 매년 5월의 마지막 월요일을 법정공휴일 현충일(Memorial Day)로 지정해서 전몰장병을 기리고 있다. 또 5월의 세 번째 토요일은 국군의 날로 지정되어 있다.

국가 정체성 공유돼야 국가로 존속

알링턴하우스(남부군 지도자 로버트 리의 저택)에서 내려다본 알링턴국립묘지와 강 너머 워싱턴 DC. 남부군 지도자의 땅에 북부군 묘지를 조성하면서 시작된 국립묘지다. [사진 김재한]

알링턴하우스(남부군 지도자 로버트 리의 저택)에서 내려다본 알링턴국립묘지와 강 너머 워싱턴 DC. 남부군 지도자의 땅에 북부군 묘지를 조성하면서 시작된 국립묘지다. [사진 김재한]

대한민국에서는 현충일이 법정공휴일로, 재향군인의 날과 국군의 날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있다. 국군의 날은 공휴일이 아니지만 국기를 게양하는 날로 현행 법규에 정해져 있다. 지난 9월 국회에는 국군의 날을 현행 10월 1일에서 9월 17일로 변경하자는 결의안이 발의됐다. 1950년 국군이 처음 38선을 돌파한 날을 대신해 1940년 임시정부 광복군이 창설된 날로 바꾸자는 제안에 보수 야당은 반발하고 있다. 건국일에 대해서도 첨예한 이견이 대립하고 있다.

국경일 지정이 국민통합을 이끄는 구심력 대신에 국민분열을 조장하는 원심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국가보훈이 국민을 통합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시키는 이유는 일부 계층의 과거 잘못과 자기합리화뿐 아니라 국가 정체성을 서로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뭣이 중헌디?’라고 생각하면서도 양극화된 진영 논리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하나의 국가체제로 존속하려면 국가 정체성이 공유돼야 한다. 안고 가는 게 통합에 도움될 수도 있고, 반대로 안고 가다가는 오히려 통합에 방해될 수도 있다. 만일 국가 정체성을 도저히 함께 공유할 수 없으면 갈라서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내부 분열의 정도가 외부 위협보다 강하면 체제는 멸망의 길로 가게 되어 있다. 과거사 정리와 보훈은 애국심을 고양하여 진정한 국민통합을 이루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한다. 국가보훈은 그 대상이 과거 행동이지만 목적은 미래 공헌을 유도하는 것이다.

김재한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 내셔널 펠로. 2010년 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 현상의 수리적 분석에 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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