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20대엔 왜 몰랐을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17년 1월 딸을 낳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모델 장윤주. [사진 에스팀]

2017년 1월 딸을 낳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모델 장윤주. [사진 에스팀]

모델 장윤주(37)를 만나자고 했을 땐 다른 의도가 있었다. 올해로 데뷔 20년차. 전환점을 맞아 모델로서 뭔가 할 말이 있을 거라는 기대였다. 더구나 '모델테이너(모델+엔터테이너)'의 원조 격 아닌가. 화보나 런웨이만이 아닌 TV프로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이하 '도수코')'와 '무한도전', 그리고 영화 '베테랑' 등이 모두 그의 필모그래피에 있다. 강산이 두 번 변할 동안의 모델 인생, 세태따라 달라진 모델의 업을 이야기할 만했다.
그런데 정작 달라진 그는 다른 걸 내밀었다. 모델 말고 엄마. 2017년 1월 딸 리사를 낳은 그의 삶은 엄마라는 단어로 모아졌다. 딸 이름으로 새 음반을 내고, 9월 26일 종영한 tvN 예능 '신혼일기2'를 통해서는 육아에 허덕이는 초보 엄마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 제주도 바닷가 마을에 내려와 지내며 일상을 보여주는 이 프로에서 그는 1년 넘게 영화관 근처에 가본 적도 없다는 걸 떠올리며 우울해 했고, 아이와 외출 한 번 할라치면 이사하듯 한 보따리 짐을 챙겼다. 외식은 아이가 얌전한 사이 후딱 배를 채워야 하는 미션으로 달라져 있었다. 카리스마가 생명이라는 톱모델이 이런 민낯을 드러낸 작심은 무엇일까. 의도를 내려놓으니 그 속내가 더 궁금해졌다.

가족과의 일상을 보여주는 예능 프로 '신혼일기'에서 그는 초보 엄마의 힘든 육아를 그대로 보여준다. [사진 방송 캡처]

가족과의 일상을 보여주는 예능 프로 '신혼일기'에서 그는 초보 엄마의 힘든 육아를 그대로 보여준다. [사진 방송 캡처]

'신혼일기'의 촬영지인 제주도 한 바닷가 마을에서 찍은 장윤주 가족의 모습. [사진 tvN ]

'신혼일기'의 촬영지인 제주도 한 바닷가 마을에서 찍은 장윤주 가족의 모습. [사진 tvN ]

출산 뒤 첫 방송으로 왜 리얼리티 예능을 택했나.  

"아이를 낳고 서너 달부터 출연 제안은 많았다. 그런데 일회성으로 나가면 할 이야기가 뻔했다. 출산 뒤 어떻게 살을 뺐나, 혹은 엄마 키만큼 아이가 큰가(4.3㎏였다), 라는 얘기가 나올 터였다. 몸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모델에게 그걸 기대하는 게 무리는 아니지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어떻게든 계속 풀어내야 하는 복잡한 인간이다. 라디오 DJ를 4년이나 한 것도, 노래 실력이 썩 좋지 않은데도 벌써 세 장이나 앨범을 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야기를 풀 만한 프로를 골랐다. "

어떤 이야기인가.

"복귀를 하자니 소속사에서도 걱정이 많았다. '그냥 아줌마'가 돼버릴 수 있다는 거다. 현직 모델로서 엄마가 된 뒤 어떻게 일을 이어가야 하는지 전례가 없어서 우왕좌왕 했다. 엄마 모델이 있긴 해도 모델 그 자체를 계속하다 출산하고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별로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표본을 만들고, 또 개척해야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차피 이전과 다른 나라면 그중에서도 가장 최상의 모습일 수 있는 게 뭘지 고민했다. 솔직히 엄마가 됐다는 게, 아니 엄마로 보여지는 게 두려웠다. 하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니까 괜찮지 않느냐고 스스로 타일렀다.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현실적 아름다움을 보여주자고 마음 먹었다. "

'신혼일기'서 육아생활 공개한 모델 장윤주 인터뷰 #모델이자 엄마라는 롤모델 고민하다 출연 #17살에 서울컬렉션 데뷔 20년차 #"20대에 늙은이 자처했던 일 가장 아쉬워"

패션지 '얼루어'의 2017년 1월호를 커버를 장식한 장윤주의 만삭 화보. [사진 얼루어]

패션지 '얼루어'의 2017년 1월호를 커버를 장식한 장윤주의 만삭 화보. [사진 얼루어]

막상 출연하고 나니 부담스럽지 않았나.  

"할까 말까 선택하기까지 고민 할 수는 있지만 일단 확신을 가지고 즐길 만하다 싶으면 앞뒤 재지 않는 게 내 스타일이다. 최대한 나답게 상황에 올인한다. 영화 '베테랑' 대본을 받았을 때도 처음에는 못하겠다고 하다가 류승완 감독과 세 시간 수다 떨고 나서 '제대로 놀 수 있겠다'라는 판단이 선 뒤엔 두려움이 없었다. 엔터테이너는 상업적인만큼 멋지게 하는 사람이다. 한 컷을 찍더라도 자신감 있는 게 중요하다. 내가 모델로서 노출이 많은 화보를 주저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위축되기보다 모델로서의 아름다움, 나만의 힘을 발휘하겠다 하면 그게 진짜 멋진 거라고 생각해서다. "

세번째 미니앨범 'LISA'에 실린 사진. [사진 에스팀]

세번째 미니앨범 'LISA'에 실린 사진. [사진 에스팀]

최근 앨범까지 냈는데.

"어릴 때부터 워낙 음악을 좋아해서 직접 작사·작곡에 노래도 한다. 2012년에 두번째 앨범을 내고 5년 만이다. 현재 내 인생에 가장 큰 변화를 준 딸에게 영감을 받아 두 곡('리사' '영원함을 꿈꾼다')을 만들었다. 원래 출산 뒤 집 근처에 피아노만 치는 공간을 따로 얻어서 곡을 만지작거렸는데 '신혼일기' 촬영이 끝나고나니 공허함이 들더라. 그 곡들을 다시 붙잡고 썼다. 한 번도 끊기지 않아서 2주만에 편곡·녹음이 끝났다. "

싱어송라이터인 장윤주는 2013년 서울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중앙포토]

싱어송라이터인 장윤주는 2013년 서울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중앙포토]

노래까지 만드는 거 보면 엄마로 준비된 사람 같다.

"전혀. 원래 혼자 사는 게 감당 되면 그러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생각도 고민도 많이 해서 누구 한 사람과 산다는 게 힘들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4살 연하의 디자인 컨설팅과 TRVR의 디렉터 정승민씨)과 사계절을 다 만나지도 않고 결혼을 했다. 주변에서는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다. 정말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데, 이 스토리는 너무 길다. 신혼일기 제작팀도 실컷 다 듣고 찍더니 그건 CBS(종교방송) 가서 하라고 하더라."

두 개의 수록곡에 '영원'이라는 가사가 유독 많이 나온다.

"'영원히'라는 말은 뻔한데도 정작 노래에 넣자니 쉽지 않았다. '영원히 너의 편이 돼 준다'는 가사를 곱씹으면서 나도 이런 사랑을 받았을까 싶더라. 아직도 내게 어떤 결핍이 있고 내 자신에게도 엄마가 돼 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암튼 이런 복잡한 감정을 풀어낸 게 이번 노래들이다. "

17세에 진태옥 디자이너 쇼에 선 당시 모습. [사진 진태옥]

17세에 진태옥 디자이너 쇼에 선 당시 모습. [사진 진태옥]

자꾸 내면을 이야기 하고 싶다면서 정작 겉모습이 중요한 모델이 됐다.

"모델 데뷔는 17살이지만 준비는 훨씬 전부터 했다. 중학교 1학교 때 수학 선생님이 내 다리를 보고 모델 해도 되겠다고 했는데, 그 말이 오래 가슴에 남았다. 왠지 그 일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런데 막상 모델 학원에 가보니 키(171㎝)가 크지 않아서 데뷔가 쉽지 않았다. 워킹 연습 하면서 2년 반이나 보냈다. 그 당시만 해도 늘씬하고 길쭉한 모델을 원하던 때여서 오디션만 가면 떨어졌다. '아동복 쇼에 왔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안 되겠다, 관두려고 하는데 엄마가 키 때문이라면 더 노력해보자면서 수영을 권했다. 사실 운동을 한 뒤에도 키는 크지 않았는데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왠지 자신감이 붙었다. 키가 작아도 멋있을 수 있고, 돋보일 수 있다고 생각됐다."

'SYJP'의 2016 봄여름 컬렉션에 선 모습. [사진 보그코리아]

'SYJP'의 2016 봄여름 컬렉션에 선 모습. [사진 보그코리아]

 'YCH'의 2016 가을겨울 컬렉션에 선 모습. [사진 보그코리아]

'YCH'의 2016 가을겨울 컬렉션에 선 모습. [사진 보그코리아]

실제 상황도 달라졌나.

"그때 이후 신기하게 오디션에 몇 번 붙었다. 그러다 1997년 진태옥 디자이너의 서울 컬렉션으로 데뷔하며 신데렐라가 됐다. 당시 내 캣워크 번호가 29번이었다. 한 마디로 수많은 모델 중에 그저 하나란 뜻이다. 그런데 진 선생님이 모델들을 쭉 보다가 나를 가리켰다. '저 꼬마 애 눈빛이 너무 좋아서 오프닝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

결국 모델도 몸보다 내공인가.

"지금도 데뷔에 2년 반이 걸렸다고 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그 시간이 절대 쓸데 없었던 게 아니었다. 당시에 패션잡지란 잡지는 다 보면서 디자이너나 의상 공부를 해둔 것이 데뷔 이후 큰 도움이 됐다. 사람들은 모델을 일차원적인 비주얼로 보지만 롱런하려면 멘탈을 지키고 있는 게 훨씬 중요하다. 포즈 잘 하고 워킹 멋지고 그런 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도 후배들 중에 스케줄이 없을 때 마냥 늘어지는 애들이 있는데 참 답답하다. 운동도 더 해야 하고 의상, 음악 공부를 그럴 때 해야하지 않나. 이건 일을 바라보는 태도의 문제다."

장윤주는 2010년 '무한도전'에 출연하며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중앙포토]

장윤주는 2010년 '무한도전'에 출연하며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중앙포토]

올해가 데뷔 20주년이다. 그 세월 동안 가장 아쉬운 점을 꼽자면.

"지난해 임신을 하면서 스케줄이 줄고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삶을 되돌아 봤다. 왜 나는 20대 초·중반에 그렇게 두려움이 많았을까 싶더라. 후배이자 '도수코'에서 멘토링을 했던 정호연·최소라·신현지 등이 지금 해외에서 날아다니는 걸 보면 더 그렇다. 그래서 얘네들이 가끔 연락 와서 너무 힘들다고 할 때마다 마음껏 즐기라고, 괜찮다고 말해준다. 물론 나도 어릴 때 해외에 나가긴 했는데(2000년 한국인 최초로 파리 프레타포르테의 비비안 웨스트우드쇼에 출연) 그땐 더 많은 걸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세상이 만든 한계에 갇혀 나도 모델 수명이 짧다고 여겼다. 스물 다섯에 '나는 늙은이' 라고 여겼다. 이제야 내 20대를 돌아 보면서 그 나이가 얼마나 좋은 나인데, 뭐든 가능한 나인데 현실만 따졌을까. "

영화 '베테랑'에서 형사 역할을 맡은 장윤주. [중앙포토]

영화 '베테랑'에서 형사 역할을 맡은 장윤주. [중앙포토]

그럼에도 지금껏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맞다. 오히려 서른을 맞았을 때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기 때문이다. 왠지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해외 나가는 건 늦었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나서 '무한도전' 섭외가 들어오더라. 20대 후반에 섭외 연락이 왔을 땐 딱 잘랐는데 서른이 되고 나니 오히려 나가보겠다고 했다. 캣워크와는 다르게 물 만난 고기처럼 밝은 면들을 자유롭게 표현하니 반응도 좋았다. '도수코' 시즌5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방송으로 영역이 넓어졌다."

모델 선발 프로그램인 '도전수퍼모델'에서 시즌1부터 4까지 멘토 역할을 맡았다. [중앙포토]

모델 선발 프로그램인 '도전수퍼모델'에서 시즌1부터 4까지 멘토 역할을 맡았다. [중앙포토]

데뷔 20주년 기념 프로젝트는 없나.

"5년 전부터 아이디어는 많았는데 아이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무산됐다. 배우 윤여정 선생님도 데뷔 50주년에 영화 한 편 내놓은 거밖에 없는데 내가 뭐라고 대단하게 하나 싶더라. 생명이 태어났고, 앨범이 나온 걸로 소소하게 지나가도 아쉬울 게 없을 것 같다. 올해 시작해서 서서히 보여주면 된다는 마음이다. 다만 20년 동안 꾸준히 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게 뿌듯하다. 모델이 할 수 있는 시각적 작업 이상으로 내면의 갈등과 싸웠고, 이런 이야기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냈다. 후배들이 이걸 보면서 이 언니도 나와 다르지 않구나, 위안을 삼았으면 싶다."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