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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꿈의 도시로 탈바꿈하는 고깃배 항구 칼라사타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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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오전 9시 TV가 켜지자 재활 치료사가 등장해 반갑게 인사한다. 그의 동작을 따라 하며 운동을 마친 미코씨는 시내 나들이 준비를 한다. 핸드폰 앱에 목적지를 입력하니 가장 빠른 교통수단과 경로가 안내된다. 집 앞에서 자율주행버스를 타고 네 정거장을 간 뒤 트램으로 갈아타면 목적지다. 교통비는 클릭 한 번으로 결제 끝. 집을 나서자 집안의 센서가 주인이 외출한 걸 감지하고 쓰지 않는 전자기기 전원을 모두 끈다. 점심을 먹은 뒤 귀가 길엔 앱으로 집의 히터를 켜놓는다. 전기·수도·가스 사용량은 실시간 앱으로 전송된다.’

공상과학소설 속 미래가 아니다. 핀란드 헬싱키 시가 짓고 있는 미래 스마트시티 ‘칼라사타마(Kalasatama)’ 청사진이다. 2008년까지만 해도 이곳은 버려진 항구였다. 칼라사타마는 핀란드어로 고깃배 항구란 뜻이다.

핀란드 헬싱키에 건설 중인 스마트시티 프로젝트 #2013년부터 17년 동안 주민과 시정부가 만들어가 #헬싱키 시내에선 버스 트램 지하철 모바일로 연결 #개인정보의 주인은 개인이란 마이데이터 정책 실현

버려진 항구였던 칼라사타마. 왼쪽에 보이는 굴뚝은 화력발전소다. 2020년까지 폐쇄하고 모든 에너지는 태양열과 풍력으로 생산할 계획이다.                               [헬싱키시]

버려진 항구였던 칼라사타마. 왼쪽에 보이는 굴뚝은 화력발전소다. 2020년까지 폐쇄하고 모든 에너지는 태양열과 풍력으로 생산할 계획이다. [헬싱키시]

헬싱키 인구가 자꾸 불어나자 신도시 부지를 물색하던 시정부는 2010년 분당신도시의 10분의 1 수준인 1.8㎢ 면적의 이곳을 사물인터넷(IoT)과 자율주행 전기차, 스마트 그리드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총동원한 스마트시티로 개발하기로 했다. 전기도 태양열과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로 생산한다.

2030년 완공 후 칼라사타마 조감도. 버려진 어항에 스마트시티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다.    [헬싱키시]

2030년 완공 후 칼라사타마 조감도. 버려진 어항에 스마트시티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다. [헬싱키시]

그런데 개발 방식은 2~3년 만에 후딱 짓고 분양하는 한국 신도시와는 딴판이었다. 2013년 1차로 입주자를 모집한 뒤 시정부와 개발회사, 주민, 시민단체, 학자 등 이해관계자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만들어가는(co-create) 방식이다. 완공 시점도 공사를 시작한 지 17년 뒤인 2030년이다. 현재 3000명인 입주민은 2030년까지 2만5000명으로 늘리고 1만개의 일자리를 만드는 게 시정부 목표다.

스마트 칼라사타마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시정부 자회사 포럼비리움의 비라 무스토넨 대표는 “이번 프로젝트는 스칸디나비아식 직접 민주주의 실험이기도 하다”며 “칼라사타마는 신도시이면서 앞으로 수많은 4차 산업혁명 기술과 아이디어를 실제 도시에 적용해보는 실험장도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칼라사타마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는 포럼비리움의 비라 무스토넨 대표. [사진 정경민 기자]

칼라사타마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는 포럼비리움의 비라 무스토넨 대표. [사진 정경민 기자]

그는 “실제 살고 있는 주민과 공무원, 학자, 시민단체 활동가 등으로 구성된 ‘혁신가 클럽(Innovator’s club)’이 수시로 만나 개발 방향과 예상치 못한 문제에 대한 해법을 논의하고 시정부는 이를 공사에 반영한다”고 했다.

칼라사타마의 입주민 회의 모습. 뒤에 보이는 건물은 초등학교다.                [헬싱키시]

칼라사타마의 입주민 회의 모습. 뒤에 보이는 건물은 초등학교다. [헬싱키시]

중심부에선 22~37층짜리 8개의 고층건물로 구성될 ‘칼라사타마 센터’ 공사가 한창이었다. 바로 옆엔 3000명이 거주하는 아파트단지가 이어졌다.

22~37층짜리 8개의 고층건물로 구성될 ‘칼라사타마 센터’ 공사 현장.        [사진 정경민 기자]

22~37층짜리 8개의 고층건물로 구성될 ‘칼라사타마 센터’ 공사 현장. [사진 정경민 기자]

지하 파이프로 연결된 중앙집중식 쓰레기 분리수거기에 신문지를 넣던 프랑크 로에흐씨는 “아파트엔 처음 살아보는데 모든 게 편리하다”며 “미래 신도시를 만들어가는데 참여하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칼라사타마에 입주한 프랑크 로에흐씨가 중앙집중식 쓰레기 분리수거기에 신문을 버리고 있다. [사진 정경민 기자]

칼라사타마에 입주한 프랑크 로에흐씨가 중앙집중식 쓰레기 분리수거기에 신문을 버리고 있다. [사진 정경민 기자]

이곳에선 지난해부터 스타트업이 제안한 20개의 실험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아파트 단지엔 소흐요아(Sohjoa)란 자율주행버스가 운행 중이다.

칼라사타마에 운행 중인 자율주버스 소흐요아.                          [헬싱키시]

칼라사타마에 운행 중인 자율주버스 소흐요아. [헬싱키시]

Witrafi는 빈 주차장을 공유하는 앱을 시험하고 있다. 피기배기는 태양열과 풍력 발전기를 이용한 공용 도서관과 냉장고 컨테이너를 열었다.

피기배기가 설치한 도서관. 태양열과 풍력으로 발전한 전기를 쓴다. 초록색 기둥이 풍력 발전기다. 오른쪽이 무료 도서관이고 왼쪽은 주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냉장고다. [헬싱키시]

피기배기가 설치한 도서관. 태양열과 풍력으로 발전한 전기를 쓴다. 초록색 기둥이 풍력 발전기다. 오른쪽이 무료 도서관이고 왼쪽은 주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냉장고다. [헬싱키시]

이노그린은 이곳 초등학교에 ‘그린월’이란 빗물을 이용한 생태학습장을 설치했다. 책장처럼 생긴 구조물에 풀과 꽃을 심은 뒤 빗물이 타고 내려오도록 만든 시설이다. 풀과 꽃이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곤충도 찾아 든다. 포럼비리움의 마이야 베르그스트룀은 “어린아이들은 매일 식물과 곤충을 관찰하면서 자연을 접한다”며 “실험 프로젝트로 채택된 스타트업은 8000유로의 지원금을 받고 6개월간 입주민을 대상으로 실생활 테스트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노그린이 초등학교에 설치한 그린월. 빗물이 책장모양의 구조물을 타고 내려오도록 설계돼있다. [사진 정경민 기자]

아노그린이 초등학교에 설치한 그린월. 빗물이 책장모양의 구조물을 타고 내려오도록 설계돼있다. [사진 정경민 기자]

헬싱키 시내에선 또 다른 IoT 실험이 진행 중이다. 시내의 모든 교통수단을 모바일 앱으로 연결하는 프로젝트다. 교통수단을 소유에서 이동이란 개념으로 바꾸자는 ‘마스(MaaS, Mobility as a Service)’다.

헬싱키 시내의 트램. 휨(Whim)이란 앱을 이용하면 클릭 한 번으로 트램 버스 지하철은 모두 이용할 수 있다. [사진 정경민 기자]

헬싱키 시내의 트램. 휨(Whim)이란 앱을 이용하면 클릭 한 번으로 트램 버스 지하철은 모두 이용할 수 있다. [사진 정경민 기자]

버스·지하철 등 대중교통부터 자가용·렌터카는 물론 자전거·오토바이까지 모든 교통수단을 앱으로 연결해 이동의 혁신을 이루자는 취지다. 궁극적으로 자율주행차와 공유차까지 연결되면 자가용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된다.

모든 교통수단을 모바일 앱으로 연결하자는 마스 프로젝트.                [마스 글로벌]

모든 교통수단을 모바일 앱으로 연결하자는 마스 프로젝트. [마스 글로벌]

이미 프랑스·독일·스페인·오스트리아 등 유럽과 미국의 도시들이 이 실험을 검토 중이거나 착수했지만 헬싱키는 ‘휨(Whim)’이란 앱을 이미 상용화해 한발 앞서 가고 있다. 마스 글로벌이 개발한 모바일 앱 휨에 목적지를 입력하면 가장 빠른 교통수단과 경로가 안내된다. 교통비 결제도 클릭 한 번이면 끝난다.

마스 글로벌의 창립자인 카야 피흐티에는 “현재는 버스·트램·지하철·렌트카 등만 이용할 수 있지만 조만간 시티바이크·오토바이까지 연결될 것”이라며 “이용자가 도중에 버스를 놓치거나 스케줄을 바꿀 경우 앱이 자동으로 다음 교통수단 스케줄을 조정해 끊김이 없는 서비스를 구현하는 게 목표”라고 설명했다.

마스 글로벌 창립자 카야 피흐티에.                            [사진 정경민 기자]

마스 글로벌 창립자 카야 피흐티에. [사진 정경민 기자]

그는 “지난 9월 영국 버밍햄에서도 휨 서비스를 시작해 헬싱키에서 버밍햄까지도 연결됐다”며 “내년까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비롯해 세계 15개 도시에서 상용화될 것”이라고 했다.

혹한 속 자율주행차 시험 도로 프로젝트 '오로라'

 자율주행차 개발에 난제 중 하나는 날씨다. 특히 도로가 눈과 얼음으로 뒤덮이는 혹한의 조건에서 자율주행차를 운행하는 기술을 확보하는 게 어렵다. 이를 위해선 혹한의 실제 도로에서 주행 시험을 하는 게 필수다. 그런데 혹한의 조건과 주행 시험을 위한 계측 장비·통신망을 두루 갖춘 시험도로를 찾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핀란드 교통국(FTA)이 2015년부터 추진해온 ‘오로라(Aurora) 프로젝트’는 이를 겨냥했다. 북극권 안에 속한 E8 고속도로에 자율주행차나 스마트카를 위한 세계 최초의 혹한 시험도로를 만드는 프로젝트다. 1단계 파흐토넨~ 무오니오 10㎞ 구간은 지난 8월 착공해 내년 1월 완공할 계획이다. 2단계는 코라리~킬피스에르비 270㎞ 구간으로 노르웨이 국도까지 포함하게 된다.

오로라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E8도로.

오로라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E8도로.

시험 도로엔 지능형교통정보시스템(ITS)은 물론 차세대 이동통신 서비스인 5G 네트워크가 깔린다. 도로 바닥과 갓길에는 차량을 감지하는 센서가 설치돼 차량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다. 1~5㎝까지 구별이 가능한 위성위치추적시스템(GPS)과 고화질 디지털지도도 제공된다.

핀란드가 혹한기 자율주행차 시험대로 안성맞춤인 건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 핀란드는 5단계의 자율주행차 중 4단계까지 일반도로에서 운행할 수 있다. 오로라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E8도로도 일반 차량이 다니는 고속도로다. 여기다 ‘자동차엔 운전자가 있어야 하지만 반드시 차 안에 타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도로교통법 조항을 가진 유일한 나라다. 원격 조정 가능성을 열어준 셈이다.

오로라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는 핀란드 교통국 레이야 비나넨 이사. [사진 정경민 기자]

오로라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는 핀란드 교통국 레이야 비나넨 이사. [사진 정경민 기자]

오로라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는 레이야 비나넨 FTA 이사는 “핀란드는 자율주행차에 대한 규제가 세계에서 가장 적고 시험주행에 협조적인 나라”라며 “자동차 메이커는 최적의 날씨와 실험 장비를 갖춘 실제 도로에서 시험 주행을 할 수 있어 좋고 우리는 실험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어 서로 윈-윈이 되는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스웨덴 볼보를 비롯해 70여개 업체가 오로라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데 한국 자동차회사도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내 정보의 주인은 나다.’
핀란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인정보 개혁정책인 ‘마이데이터(MyData)’의 모토다. 디지털시대가 오면서 개인정보가 홍수를 이루고있다. 스마트폰 이용 기록, 송금 내역, 병원 진료 기록 등등 하루에도 천문학적인 개인정보가 생성된다. 더욱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개인정보는 돈이다. 2012년 보스턴컨설팅은 2020년 유럽연합(EU)에서만 개인정보의 가치가 1조유로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정작 정보를 생산하는 주체인 개인은 자신이 생산한 정보로부터 소외돼있다. 스마트폰 이용 기록은 통신사가, 병원 진료 기록은 병원이, 송금 내역은 은행이 각자 서버에 꽁꽁 숨겨놓고 있기 때문이다. 내 정보지만 마음대로 열어볼 수도 유통시킬 수도 없다.

더욱이 개인정보는 갈수록 페이스북·구글·아마존과 같은 공룡 플랫폼에 집중돼 개인의 접근은 더 어려워졌다. 마이데이터는 이 같은 개인정보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정보의 소유권을 주인인 개인에게 돌려주자는 구상이다.

핀란드 정부가 설립한 기술지원센터 테케스(Tekes)의 미카 클레메티넨 박사는 “개인정보가 서비스회사에 분산 소유돼다 보니 4차 산업혁명에 필수적인 빅데이터를 활용할 수 없다”며 “개인에게 정보의 이용권을 돌려주면 이런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8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마이데이터 국제컨퍼런스 포스터.

지난 8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마이데이터 국제컨퍼런스 포스터.

각자가 생산한 개인정보를 온라인 상의 개인 계정에서 은행 계좌처럼 통합관리하면서 수시로 열어보거나 원하는 서비스회사에 사용을 허락할 수 있게 해주는 방식이다. 노키아의 매티 반스카 메디털·헬스 이니셔티브 책임자는 “헬스케어 분야에선 이미 마이데이터 제도가 도입돼 방대한 진료 빅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게 됐다”고 소개했다.

마이데이터 구상은 2012년 세계경제포럼(WEF) 때 처음 제안됐다. 2014년 9월 핀란드 교통통신부가 가장 먼저 자국에 적용할 마이데이터 정책의 개념과 정책방향을 담은 보고서를 발간하고 2015년 5월 국가 어젠다로 채택했다. 2016년부터는 헬싱키 알토대학 주도로 매년 여름 마이데이터 국제컨퍼런스를 열고 있다.

유럽연합(EU)도 마이데이터 개념을 2018년 5월부터 회원국에 적용될 개인정보호법(GDPR) 20조에 명문화했다. 개인정보를 개인이 다운로드 받거나 제3자에게 넘길 수 있도록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법으로 보장했다.

지난 8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마이데이터 국제컨퍼런스 모습.

지난 8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마이데이터 국제컨퍼런스 모습.

그러나 아직 풀어야 할 숙제는 많다. 각 개인이 자신의 개인정보를 관리할 계정을 어떻게 만드느냐를 놓고는 아직도 논의가 진행 중이다. 핀란드 정부는 e메일 계정처럼 여러 사업자가 마이데이터 계정을 서비스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유럽과 달리 한국은 여전히 개인정보의 이용보다는 보호에만 급급한 실정이다. 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신용정보법 등 개인정보 관련 3대 법 어디에도 개인의 정보 이용이나 이동권을 명시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개인정보의 이용을 꽁꽁 묶어놨다.

마이데이터 개념도. 정보를 생산하는 개인이 중심이 되는 정보 생태계.

마이데이터 개념도. 정보를 생산하는 개인이 중심이 되는 정보 생태계.

그나마 미래창조과학부가 정보통신기술(ICT)정책 연구사업 과제로 ‘K-마이데이터’ 사업을 채택했다. 유럽의 마이데이터 정책을 벤치마킹하자는 취지다. 핀란드 무역대표부 최형욱 수석상무관은 “개인에게 정보 주권을 돌려주면 프라이버시 보호도 더 강하게 할 수 있다”며 “개인정보의 보호보다 이용 쪽으로 정책의 무게중심을 하루빨리 옮겨야 4차 산업혁명에서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핀란드 헬싱키=정경민 기자 jkm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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