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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월만에 日에 온 만경봉호 르포] 日, 7시간 검색 끝에 "출항 금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일본 니가타(新潟)항에 7개월 만인 25일 입항한 북한 화물.여객선 만경봉92호가 안전검사 결과 5개 위반 사항이 적발돼 시정될 때까지 출항이 금지됐다.

이날 오전 8시쯤 항구에 접안한 만경봉호는 두시간 뒤부터 7시간에 걸쳐 일본 해상보안청과 입국관리소.세관 당국의 대대적인 선상 안전검사를 받았다. 10년 만의 일이다.

적발된 항목은 ▶부엌 환기구의 화재 조절판 미비▶비상구 표시등의 높이와 밝기 위반▶비상시 항공기와 연락하기 위한 무선전화 미비▶바닷물을 이용한 화재진압 장비 미비▶기름과 하수 분류장치 오류 등이다. 만경봉호는 위반 사항이 지적되자 즉각 수리에 나섰다.

이날 아침 만경봉호가 모습을 드러내자 니가타항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납치는 테러'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내세운 피랍자 가족.피랍자를 구하는 모임 회원 등 1백여명의 반대 목소리, 조총련계 재일동포 1백50여명의 환호가 한꺼번에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30분 뒤 항구는 다시 뜨거운 긴장감에 빠져들었다.

'영광스러운 조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적힌 플래카드 등을 내붙인 조총련계 인사들이 크고 작은 인공기를 흔들고, 만경봉호 승무원들도 인공기로 화답하며 배에서는 '김정일 장군님의 노래' 등 노래가 울려퍼졌다.

경찰.언론사 헬리콥터 네 대가 만경봉호 상공을 선회했고 눈을 곤두세운 작은 감시선들도 바삐 오갔다.

만경봉호는 당초 지난달 입항할 예정이었으나 핵.납치 문제로 일본 내 비판 여론이 거세지고, 이 배가 북한의 공작.밀수에 이용된다는 지적이 일면서 일본 정부가 선박안전검사(PSC) 강화 카드를 빼들자 운항을 취소했다.

그러다 이번에 승객 34명.승무원 74명.화물 38t을 싣고 온 것이다. 항구엔 일본 언론.CNN.로이터 등의 기자 2백여명이 몰렸다. 일본의 TV뉴스 채널은 줄곧 생중계했다.

승객인 재일동포 2세 김생화(金生華.44)씨는 "매형이 상을 당해 북에 갔다 돌아왔는데 마약 탐지견까지 동원돼 짐을 샅샅이 뒤지는 등 범죄인 취급을 받았다"고 투덜댔다.

그러나 피랍자를 구하는 모임의 하스이케 도루 (蓮池透)사무국장은 "북한에 경제제재 등 압력을 넣어야 하는 판에 정부가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경찰 1천5백여명을 배치해 만경봉호 2백여m 앞부터 허가받지 않은 사람들의 통행을 철저히 통제했기 때문이다. 통제선을 넘으려면 가방 검색까지 받아야 했다. 계엄령이라도 내려진 것 같았다.

통제선 밖엔 우익단체들이 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항구 부근 조총련 사무실의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전국에서 몰려온 가미카제 특별공격대 등 극우단체의 검은색 차량들이 "조선총련은 일본에서 꺼져라"는 내용의 방송을 하며 사무실 앞을 오갔다.

오전 11시40분쯤 30대 남성이 조총련 사무실 앞에서 "납치당해 죽은 일본인만큼 조선인을 죽일 것""조선인은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폭언을 10여분간 쏟아부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북조선에 대한 침략 전쟁 저지하라''총련 총격 탄압 중단하라'고 적힌 깃발을 든 일본인 30여명이 열지어 왔다. 이 지역 노조원과 학생들이었다.

오시타 고지(大枝幸司) 도야마대 학생은 "일본이 조선에 잘못한 점은 생각하지 않고 납치 문제만 비판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니가타항은 일본 진보.우익세력의 현주소, 끝나지 않은 일제 상흔(傷痕), 북한 문제의 단면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곳이다.

니가타=오대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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