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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방송통신 융합 속 한국 방통위엔 ‘방송’만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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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9호 15면

정치 이슈에 매몰된 방송 시장

지난 12일 미국 이동통신업체 T모바일은 소비자를 상대로 한 가지 색다른 상품을 내놓았다. 자사의 무제한 요금제에 새로 가입하는 고객에게 넷플릭스에서 유통하는 모든 방송·영화 콘텐트를 공짜로 제공하겠다는 파격적 제안이었다. 방송과 이동통신을 결합한 시장 파괴적 서비스다. 4인 가족 기준으로 1인당 40달러(약 4만5300원)를 지불하면 미 전역에서 4세대 이동통신(LTE)뿐만 아니라 넷플릭스 콘텐트까지 함께 이용할 수 있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은 “T모바일은 전 세계에서 탈(脫)통신 전략에 가장 적극적인 업체”라며 “한국 이통업체나 네이버·카카오가 이런 서비스를 하겠다고 하면 과연 규제 당국이 허가해 줄까”라고 반문했다.

뉴스·동영상과 결합하는 미국 이통 3사

2001년 1월 ‘세기의 결합’으로 불렸던 ‘AOL타임워너’ 출범 이후 16년 만에 미디어 시장에 다시 한번 빅뱅이 몰아닥치고 있다. 이른바 콘텐트(C)-플랫폼(P)-네트워크(N)-디바이스(D) 간 결합이 글로벌 조류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미 T모바일, 넷플릭스 무료 제공 #버라이즌은 아예 미디어 회사로 #애플도 미디어에 1조원 넘게 투자 #구글 등 플랫폼 기업 맞서 합종연횡 #방통위원 5명 전원 방송 출신 #ICT 관련 전문가 한 명도 없어 #미 FCC는 위원 한 명만 언론 경력 #“방통융합 추세 몰라 기계적 해법”

미국의 경우 이동통신업체와 케이블TV, 언론사 간 인수합병(M&A)이 빈번하다. 구글 유튜브, 넷플릭스 같은 플랫폼 업체를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제휴다. 미국 1위 이동통신업체 버라이즌은 2015년 인터넷서비스기업 ‘아메리칸온라인(AOL)’을 인수하면서 AOL이 기존에 보유한 테크크런치·엔가젯 등 정보기술(IT) 미디어까지 받아들였다. 국내에도 진출해 있는 진보 성향의 인터넷 매체 허핑턴포스트의 주인 역시 버라이즌이다.

2위 사업자 AT&T는 AOL의 옛 동업자 타임워너를 자기 진영에 끌어들였다. 지난해 10월 미국 뉴스방송 CNN, 케이블방송 HBO 등 각종 미디어 채널을 보유한 ‘방송제국’ 타임워너를 850억 달러(약 97조원)에 인수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HBO는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왕좌의 게임’ ‘뉴스룸’ 등 인기 드라마를 방송했다. AT&T는 아예 ‘코드커터’(본 방송 대신 스트리밍 서비스를 즐기는 시청자)를 겨냥해 미디어와 이동통신 서비스를 결합한 상품도 내놨다. HBO의 드라마, CNN·블룸버그의 뉴스, 21세기폭스의 영화를 패키지로 묶은 ‘다이렉TV’가 대표적이다. 기존 무제한 데이터 서비스(60달러)에 30달러(약 3만5000원)를 더 내면 이용할 수 있다.

M&A의 흐름은 업종과 국경마저 넘어섰다. 유럽에선 영국 이동통신업체 보다폰이 2013년 77억 유로(약 10조4000억원)에 독일 최대 케이블TV 업체 카벨도이칠란트를 합병했다. 김연학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막대한 자본을 들여 네트워크를 설치하는 통신업체는 지금 가입자 수 정체로 예전만큼의 수익률을 거두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구글·페이스북이 독점한 모바일 광고에서 일정 파이를 찾아올 목적으로 통신업체는 뉴스·동영상을 일종의 보완재로 선택했고 독립적인 상품 가치가 떨어지게 된 미디어 역시 통신업체와의 결합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터넷 뉴스에선 웹페이지 좌측이나 우측에 배너 광고를 노출시킬 수 있고 동영상 역시 15초 또는 30초 분량의 광고를 먼저 내보낼 수 있다.

애플 역시 지난 12일 신작 스마트폰 ‘아이폰Ⅹ(텐)’ 발표회에서 셋톱박스 ‘애플TV’를 함께 내놨다. 일반 텔레비전과 마찬가지로 각종 동영상을 4K 초고화질(UHD) 영상으로 즐길 수 있는 장치다. 지난달 애플은 TV쇼·영화 등 콘텐트 제작에 내년 한 해에만 10억 달러(약 1조1300억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올 6월에는 소니픽처스 출신의 유명 TV 프로듀서 2명을 영입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아이폰 판매가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애플은 넷플릭스의 ‘하우스 오브 카드’ 같은 자체 콘텐트로 소비자의 충성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성장세를 이어 가려는 것”이라며 “아이튠즈나 애플뮤직이 마치 넷플릭스 홈페이지같이 변모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올 4월에는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애플이 ‘미디어 공룡’ 월트디즈니를 2380억 달러(약 270조원)에 합병할 것이라는 전망이 등장하기도 했다.

정치 우위인 한국 방송 시장

사실 한국에서도 미디어 시장의 영역 파괴가 현실로 다가올 법한 순간이 존재했다. 2년 전 2015년 SK텔레콤이 케이블TV 업체 CJ헬로비전을 M&A 하겠다고 발표했을 때다. SKT는 당시 M&A 계획을 공개하며 “가입자 유치 위주의 양적 경쟁에서 벗어나 서비스 중심의 질적 경쟁으로 전환하고 3200억원 규모의 콘텐트 육성 펀드를 별도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두 회사의 합병은 공정거래위원회의 불허 결정으로 무산됐다. 공정위 결정에 앞서 방송통신위원회가 “통신 자본이 방송을 장악하면 방송 지역성과 공공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지상파 등 기존 방송 참여자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한 까닭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방통위 상임위원(5명) 가운데에는 정보통신기술(ICT) 분야를 경험한 담당자가 전무하다. 미국의 연방통신위원회(FCC)를 본뜬 합의제 기구라는 설명이 무색할 정도다. 지난 7월 4기 방통위를 이끌 수장으로 임명된 이효성(66) 위원장부터 MBC·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를 지냈다. 이후 방송위원회 부위원장,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등 주로 언론 문제에 천착했다. 문 대통령이 지명한 고삼석 상임위원 역시 노무현 정부 시절 홍보수석실 행정관을 거친 언론학 박사 출신이고, 나머지 위원 3명 모두 각각 CBS·YTN·MBC 기자 출신이다. FCC가 상임위원 5명 가운데 4명이 망 대역, 주파수 등 이통통신 전문가라는 점과는 대비된다. 아짓 파이(44) FCC 위원장만 하더라도 20대였던 1998년부터 통신법 변호사로 활동하며 20년 가까이 민간 기업(버라이즌)과 미 의회, FCC에서 이동통신 이슈를 담당해 온 경력을 지니고 있다.

4기 방통위가 KBS·MBC 지상파 파업에 개입 의사를 밝히는 반면, 파이 위원장은 올 1월 취임 직후부터 이동통신 이슈인 망중립성 완화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민주당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가 망중립성 원칙을 세운 이후 상대적으로 트래픽을 많이 일으키는 구글·넷플릭스 등 인터넷서비스업체 때문에 전체 네트워크 속도가 저하되는 등 소비자 후생이 줄어든다는 판단에서다. 김성철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정치권에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파이터’를 방통위원으로 선임하는 고질적 관행이 이어지다 보니 방통위가 사실상 방송위원회로 회귀했다”며 “방통위가 방송과 통신이란 영역별 대표성을 가진 인사들로 채워져야 전문성이 발휘되고 소비자 혜택도 커질 텐데 지금처럼 편중된 구조는 상당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 이동통신사 대관담당 임원은 “통신료 인하 이슈에서도 얼마든지 유연성 있게 소비자 후생을 늘릴 수 있지만 방통위원들이 ‘언론 헤게모니’ 싸움에만 치중해 대화가 안 된다”며 “예를 들어 무제한요금제에 각종 게임·영화를 패키지로 넣어주면 소비자·사업자 둘 다 윈윈할 수 있겠으나 당국이 ‘통신료 1만원 인하’라는 기계적 해법에 매달려 어렵다”고 토로했다.

유튜브 등 새로운 사업자엔 ‘문맹’

실제로 국내에선 어떤 부처도 구글 유튜브, 넷플릭스 등 온라인 동영상서비스(Over the top·OTT) 사업자를 담당하지 않는다. KBS·MBC·SBS 등 지상파 3사는 정보통신과학기술부, 종합편성채널·케이블TV 등 유료 방송사업자는 방통위가 나눠 관할하지만 OTT는 위 두 가지 영역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 모바일 동영상 시장의 주도권은 이미 글로벌 OTT 업체에 넘어간 상태다. 시장조사업체 DMC미디어에 따르면 절반 가까운 이용자(42.1%)가 모바일 동영상을 볼 때 가장 자주 이용하는 플랫폼으로 구글 유튜브를 꼽았다. 소셜미디어 페이스북(9.1%)까지 더하면 외국계 서비스가 국내 동영상 시장에서 절반 이상 점유율을 차지한다. 반면 가입자 수만 950만 명에 달하는 SK브로드밴드 옥수수는 8%, KBS·MBC·SBS 지상파 3사 연합의 ‘푹’은 3.1%에 그쳤다.

일각에선 국내 미디어 기업이 현 상태에 안주할 경우 내수 시장이 유튜브·넷플릭스·페이스북에 아예 지배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규모의 경제 측면에서 상대가 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넷플릭스의 올 한 해 콘텐트 투자 금액은 60억 달러(약 6조8100억원)로 같은 기간 지상파 3사 총액(8622억원)의 8배에 달한다. 넷플릭스뿐만 아니라 아마존도 올 한 해 4조5000억원, HBO는 2조3000억원을 콘텐트 제작에 쏟아붓기로 했다. 애플의 콘텐트 투자와 관련, WSJ가 “10억 달러(약 1조1300억원)라는 투자액이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 있다”고 지적한 이유다.

김성철 교수는 “넷플릭스·애플 같은 글로벌 사업자는 ‘TV 없는 TV’ 시대를 만들겠다는 ‘빅 픽처’를 구상하고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콘텐트 투자를 늘리는 추세”라며 “한국도 지상파, 지역 케이블, 웹 기반 스트리밍, 다운로드 등 기존 사업자가 칸막이를 치우고 경계를 넘나들어야 글로벌 플레이어가 생겨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현재 방송사업자와 네이버·카카오 등 플랫폼 사업자, SK텔레콤 등 이동통신 사업자 간 기존의 틀을 뛰어넘는 사업적 제휴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김영민 기자 brad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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