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캔 스피크' 나문희, "앞으로 더 배우고 싶은 건..."

9월 21일 개봉하는 ‘아이 캔 스피크’ 주연 배우 나문희·이제훈. 사진=전소윤(STUDIO 706)

[매거진M] “우리 손자야, 손자.” 다정하게 장난하는 모습으로 사진을 찍자는 제안에 나문희가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이제훈을 가리키며 말한다. 맞다. ‘아이 캔 스피크’(9월 21일 개봉, 김현석 감독)는 ‘민원왕’ 나옥분(나문희)과 원칙주의자 9급 공무원 박민재(이제훈)가 세상에 둘도 없는 할머니와 손자가 되는 이야기다.

'아이 캔 스피크' #거침없이 친근한 #나문희 인터뷰

허구한 날 남의 일에 참견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옥분과, 언제 어디서나 원칙을 내세우는 민재가 가까워지는 건, 영어 수업을 통해서. 옥분의 따뜻한 저녁상을 받은 민재가 그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정다운 수업을 계속 하는 동안에도 민재는 알지 못한다. 옥분이 어떤 비밀을 감추며 살아왔는지. 곧 옥분이 그에게 배운 영어로 “아이 캔 스피크(I Can Speak·말하겠습니다)!”라고 외치며 얼마나 큰 용기를 발휘하게 될 것인지. 그 모든 과정을 함께한 두 배우가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2017년의 어느 날,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이야기를 나누며 정다운 할머니와 손자처럼 해맑은 웃음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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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1일 개봉하는 ‘아이 캔 스피크’ 주연 배우 나문희·이제훈. 사진=전소윤(STUDIO 706)

8000건이 넘는 민원 접수로 구청 공무원들 사이에서 ‘도깨비 할매’로 통하는 옥분.나문희(76)처럼 이 깐깐한 할머니를 귀엽고, 또 애잔하게 연기할 배우는 절대 많지 않다. ‘수상한 그녀’(2014, 황동혁 감독) 이후3년 만의 스크린 복귀. 그 공백이 새삼스레 느껴지지 않는 건, 친근하기에 더 위력적인 그의 존재감 때문 아닐까.

―제목 ‘아이 캔 스피크’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나는 말할 수 있다’는 제목의 의미가 마음에 쏙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전부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잖아. ‘아이 캔 스피크’를 통해 솔직하게 말할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 ‘제목 참 잘 지었다’고 생각했지.”

―옥분 캐릭터를 어떻게 해석했나.
“나랑 꽤 비슷한 캐릭터다. 나도 옥분처럼 의협심이 많은 편이거든. 딸들이 종종 ‘오지랖 넓게 그러지 말라’고 할 정도로(웃음). 대본을 보니, 옥분은 코미디뿐 아니라 다양한 감정선을 소화해야 하는 역할이더라. 평생 해온 게 코미디와 비극이니, 잘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웃음).”

―영어 대사가 굉장히 많은데, 연기하기 어렵지 않았나.
“말도 못하지. 돌덩이처럼 굳은 머리에다 억지로 영어를 집어넣으려니 얼마나 힘들겠어. 이 영화 후반부에 영어로 연설하는 장면이 꽤 부담됐다. 그 장면에서는 어느 정도 영어를 그럴싸하게 해야 되는데, 내 발음이 이상하면 관객들의 실망이 얼마나 크겠어. 그래서 정말 열심히 연습했지(웃음).”

'아이 캔 스피크'

―가슴 아픈 위안부 역사를 다룬 영화다. 연기하면서도 여러 생각이 들었을 것 같은데.
“위안부 문제가 가슴 아픈 건, 우리나라가 그 소녀들을 지켜주지도 위로하지도 못했다는 거다. 이 영화에도 나오지만, 그저 변을 당한 소녀들을 다독이기는커녕 안 좋은 소문이 날까 쉬쉬하기만 했던 게 우리나라 가정이오, 사회였으니까. 매일 뉴스를 장식하는 끔찍한 성폭력 사건도 마찬가지다. 아프고 다친 사람을 치유하는 게 먼저야. 그걸 잊어선 안 돼.”

―후배 이제훈과 연기한 소감은.
“다소 민감한 위안부 문제를 다뤘기에 인기 배우로서 고민이 좀 됐을 텐데, 이제훈씨가 기꺼이 참여해줘서 내가 다 감동이었다. ‘박열’(6월 28일 개봉, 이준익 감독)도 그렇고, 그러고 보면 애국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야. 굉장히 정확하게 연기하고, 배우로서의 책임감과 자존심이 무척 강하다.
촬영하면서 상대 배우를 챙기기 쉽지 않은데, 우리 잘난 이제훈씨는 상대 배우도 잘 챙기고, 정확하게 시간도 엄수하고, 무엇보다 열심히 연기하더라고. 촬영하면서 많이 친해져서, 이젠 손자 같다(웃음).”

―2008년 연극 ‘잘자요, 엄마’에 함께 더블 캐스팅(엄마 역)됐던 배우 손숙도 옥분의 친구 정심으로 출연했다.
“손숙씨와 이렇게 상대역으로 연기해본 건 처음이다. 연극할 땐 더블 캐스팅이어서 은근히 경쟁심이 생길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이 영화에서 단짝 친구로 만나, 편안하고 친밀하게 연기할 수 있어서 몹시 좋았다. 정말 친구가 된 것 같았지. 우리 배우들에겐 그 점이 참 중요해. 마음이 편안해야 감정이 자연스럽게 우러날 수 있으니.”

―연극 무대에 설 때도 매일 대사를 반복해 연습한다고 들었다. 연기하면서 변치 않는 원칙이 있다면.
“글쎄, 우리 영감은 나더러 ‘노력파’라더라. 늘 대본을 가까이에 두고, 촬영 전날 준비를 모두 마쳐야 마음이 편하다(웃음). 강박관념 같은 게 있나 봐.”

9월 21일 개봉하는 ‘아이 캔 스피크’ 주연 배우 나문희·이제훈. 사진=전소윤(STUDIO 706)

― ‘아이 캔 스피크’에서는 옥분이 영어를 배우지만, 2008년 단편영화 ‘드라이빙 미스 김옥분’(임성민 감독)에서도 자동차 운전을 배우는 동명 할머니를 연기했다. 앞으로 더 배우고 싶은 게 있나.
“뭔가 배운다는 건 참 멋진 일이다. 나 역시 남은 평생을 호기심 많은 할머니로 살고 싶다. 운전은 이미 하고 있으니, 자전거를 배우면 어떨까. 그리고 영어 듣기 실력이 좀 늘면 좋겠다. 그래도 말하는 건 좀 흉내를 내겠는데, 듣기가 영 힘들어.
그래도 이 영화를 찍으며 ‘사랑해 아이 러브 유’ ‘좋은 아침 굿모닝’ 이렇게 노래로 영어를 외우다 보니, 아주 조금씩은 들리더라고. ‘두 유 라이크 커피(Do You Like Coffee)?’ 이런 거(웃음).”

―수많은 출연작 중 가장 각별하게 여기는 작품은.
“노희경 작가의 4부작 특집극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1996, MBC), 그리고 문영남 작가의 드라마 ‘바람은 불어도’(1995~1996, KBS1).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고마운 작품이다.”

―쉴 때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나.
“항상 음악을 즐겨 듣는다. 라디오 주파수 93.1MHz(KBS 클래식 FM)의 애청자지. 아침 9~11시 ‘장일범의 가정음악’을 빠짐없이 듣고, 오후 6~8시 ‘세상의 모든 음악’도 듣는다. 더 듣고 싶은 날은 ‘명연주 명음반’을 청취할 때도 있지.
음악은 내게 큰 양식(糧食)이다. 연기할 때도 늘 머릿속에 BGM을 깔고 감정을 잡거든(웃음). 제일 좋아하는 음악가는 슈베르트. 스무 살 무렵 연극하면서 처음 접했는데, 돌아보면 일터에서 교양을 쌓은 것 같네.”

9월 21일 개봉하는 ‘아이 캔 스피크’ 주연 배우 나문희·이제훈. 사진=전소윤(STUDIO 706)

―연기한 지 거의 60년이 다 됐다. 언제까지 연기하고 싶나.
“그냥 건강이 닿을 때까지, 열정적으로 연기하고 싶다. 요새 다리랑 허리가 아픈데, 촬영장에 가면 이상하게 힘이 샘솟더라고. 그냥 곰삭으면 곰삭은 대로, 좀 더 해도 될 것 같다. 너무 욕심쟁이지(웃음)? 욕심쟁이 맞다. 내 나이, 내 캐릭터에 맞는 배역이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기분을 영어로 표현하면.
“이런 건 미리 숙제로 내줬어야지. 영화가 개봉하면 ‘아임 해피(I’m Happy)’겠지만, 지금은 열심히 홍보하느라 ‘쏘 타이어드(So Tired)’. 이제 집에 보내주는 거지(웃음)?”

고석희 기자 ko.seokhee@joongang.co.kr / 사진=전소윤(STUDIO 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