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친미·반미 편가르기 동맹만 해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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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근 정부 고위당국자들의 외교 관련 발언은 듣기 민망할 정도다. 외교에 대한 기본인식이라도 갖추고 있는지 의문일 뿐 아니라 품격이라고는 눈을 씻고 들여다봐도 찾을 길 없다. 급기야 외교부 장관까지 나서서 "외교부 내에는 친미파가 없다"고 변명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발단은 노무현 대통령이 터키 방문 중 "미국인보다 더 친미적 사고방식을 갖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언급하면서다. 이 발언이 논란을 빚자 청와대 홍보수석이 "과거 안보 장사를 하던 언론이 이제 한.미동맹을 흔들어서 새로운 안보 장사를 하는 게 아닌가"라고 언론을 비난했다. 그는 "학자와 언론인 등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얘기한다"는 말도 했다. 한.미동맹의 균열을 우려하는 언론과 지식인은 '미국인보다 더 친미적'인 인물들로 매도될 위험을 무릅써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물론 우리 사회에는 '미국인보다 더 친미적'인 사람도 있고, 영어에 능통한 사람 중엔 밖에 나가서 엉뚱한 말을 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나라를 걱정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면 문제될 게 없다. 대통령이나 그의 보좌진이 말조심만 하면 아무런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는 일인데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가. 이러니 정부가 앞장서서 지식인 사회와 언론, 심지어 정부 내에서마저 친미와 반미로 편가르기 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그러니 외교부가 연 이틀에 걸쳐 "외교부엔 친미파가 없다"는 코미디 같은 해명을 하는 것이다. 이젠 외교부에선 미국통.일본통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됐다.

홍보수석의 말처럼 동맹 안에서도 사소한 협상에 있어서는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우리가 무조건 미국 말을 따라서도 안 된다. 혹시 언론이 한.미관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면 제대로 이해시키려 먼저 노력하라. 그런 노력은 하지 않고 편가르기식 발언이나 하니 정부가 앞장서 한.미동맹을 손상시키는 것처럼 됐다. 실체도 없고 증명도 안 되는 친미, 반미라는 부질없는 논쟁을 당장 끝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