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성에 충실한 한 마리 맹수처럼, '브이아이피' 김명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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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희 기자

[매거진M] 최후의 순간까지 처참하게 유린당하며 죽어간 여성들. 그 잔혹한 살인 사건 용의자로 한 청년이 지목된다. 그는 국정원과 CIA가 한국으로 빼돌린, 북한 고위 간부의 아들 김광일(이종석)이다. 이른바 국정원이 감시하는 V.I.P.다. 이 기획 귀순을 주도한 국정원 요원 박재혁(장동건)의 입장에선 절대 범인이 돼선 안 되는 자다. 반대편엔 광일을 잡아 ‘큰 건’을 올려야 하는 경찰 채이도(김명민)가 있다. 여기에, 집요하게 광일을 쫓는 북한 요원 리대범(박희순)이 가세한다.

국가 기관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상황’ 속에 어쩔 수 없이 휩쓸린 개인들의 피로. 박훈정 감독이 각본·연출한 범죄영화 ‘브이아이피(V.I.P.)’(8월 24일 개봉, 이하 ‘브이아이피’)는 바로 그런 직업적·도덕적 딜레마 사이에서 고뇌하는 남자들의 초췌한 얼굴에서 출발했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답게, 드라이하고 차가운 어른들의 영화”라는 게 박 감독의 말. ‘신세계’(2013)의 이정재와 황정민, ‘대호’(2015)의 최민식에 이어, ‘브이아이피’의 얼굴이 된 네 배우가 magazine M을 찾아왔다.

김명민 / 사진=전소윤(STUDIO 706)

불같기도, 때론 얼음 같기도 하나 초지일관 제 신념을 굽힐 줄 모르는 인물. 김명민(45)이 줄기차게 연기해 온 역할이다. 곧게 벼린 칼날에서 느껴지는 명쾌한 기운. 그것은 김명민과 ‘브이아이피’의 열혈 경찰 채이도에게 느낀 첫인상이기도 했다.

―박훈정 감독과의 첫 작업이다. 그 시작이 궁금하다.
“박 감독에게 장문의 문자로 캐스팅 제의를 받았다. 지금까진 나 홀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작품이 많았는데, 여러 인물이 하나의 이야기에 조화롭게 섞이는 구성이 무척 매력적이더라. 다른 세 배우와 짐을 나눠 질 수 있어서 좋기도 했고(웃음). 유일한 단점은 모두 함께 연기하는 장면이 거의 없었던 거다. 촬영장에서 다 함께 술 한 잔이라도 기울였으면 했는데, 그러지 못해 섭섭했지(웃음).”

―아마 박 감독이 오래전부터 점찍었던 배우라서가 아닐까.
“박 감독의 전작 ‘신세계’도 출연 제안을 받은 적이 있는데, 안타깝게 고사해야 했다. 박 감독은 여전히 내가 자기 시나리오를 ‘깠다’며 놀리지만(웃음). 나보다 훨씬 뛰어난 배우들과 훌륭한 작품을 만든 걸 보며, 언젠가는 박 감독과 꼭 함께 작업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남성 누아르 장르에서는 독보적인 연출자다.”

―이도는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경찰이다. 그만큼 확고하고 곧은 심지를 가졌다.
“비리 경찰이 아닌, 그저 자신의 본분을 열심히 다하려는 사람이다. 기존 법질서에 얽매지 않고, 야수처럼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캐릭터지. 무척 독단적이고 불같은 성격을 가졌지만, 결정적 순간에 홀로 총대를 메는 속 시원한 면도 있다. 적어도 네 주인공 중 가장 솔직한 존재가 아닌가.”

'브이아이피' 스틸컷

―경찰과 국정원 등 국가 조직의 복잡한 권력 다툼의 중심에 선 인물이기도 하다. 직업적인 전문성을 살리기 위해 고심했을 것 같은데.
“예전에도 경찰 역할을 종종 맡았기에, 특별히 준비한 건 없었다. ‘무방비 도시’(2008, 이상기 감독) 땐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를 따라다녔고, ‘거울 속으로’(2003, 김성호 감독)에선 한동안 서초경찰서에 출근한 적도 있으니까. 다만 ‘공공의 적’(2002, 강우석 감독)의 강철중(설경구) 형사와 이미지가 겹칠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너무 과하지도 밋밋하지도 않은 경찰 캐릭터를 연기하기가 참 어렵더라.”

―장동건, 박희순, 이종석 등 세 배우와의 첫 작업은 어땠나.
“(장)동건씨는 기억 못하겠지만(웃음), 20년 전 함께 연기한 적이 있다. TV 드라마 ‘모델’(1997, SBS)에서, 그의 운전수 역할로 단역 출연했었지. 무명 시절 동경하던 톱스타와 연기한다니 새삼 설레더라(웃음). 어머니께 ‘동건씨랑 함께 연기한다’고 말씀드리니, ‘너 참 성공했다’며 좋아하셨다. (박)희순이형은 대학 동문(서울예술대학 연극과) 선배이기도 해서 늘 함께 연기하길 고대해 왔다. 한데 ‘브이아이피’에 차기작 ‘물괴’(내년 개봉 예정, 허종호 감독)까지 잇따라 함께 연기할 수 있어 영광이다. 인성과 재능을 다 가진, ‘된 사람’이랄까. 막내 (이)종석이에겐 그 또래 나이답지 않은 진지한 자세가 돋보였다. 중요한 연기를 앞두고 선배들에게 의견을 구하며 세심하게 연구하는 모습이 무척 예뻤다.”

―박 감독의 전작 ‘신세계’를 기점으로, 최근 몇 년간 여러 명의 남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누아르영화가 많이 제작됐다. ‘브이아이피’는 어떤 면에서 특별하다고 보나.
“‘누아르’ 하면 으레 조직 폭력배가 연상되는데, ‘브이아이피’에서 그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남북한의 정치 관계 등 국내 실정을 다분히 반영한 점이 눈에 띈다. 소위 ‘고급진’ 누아르랄까(웃음).”

'브이아이피' 스틸컷

―최근 들어 코믹 사극, 재난영화, 괴수물 등 다양한 장르로 발을 넓히고 있다. 향후 도전하고 싶은 장르가 있다면.
“다중 인격 장애를 다룬 스릴러에 출연하고 싶다. 할리우드 영화엔 많지만 한국영화엔 잘 없었으니까. 한때는 다양하고 독특한 장르영화가 많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전형적인 상업영화로 획일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전작 ‘하루’(6월 15일 개봉, 조선호 감독)처럼, 중저예산 규모의 영화에 출연할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 미장센도, CG도 없지만 배우의 연기를 보는 재미가 있으니. 대형 상업영화도 중요하지만, ‘틈새’의 소중함을 놓쳐서는 안 된다.”

―어느덧 데뷔 20년이 넘었다. 연기하면서 여전히 숙제로 남은 부분이 있나.
“가끔 ‘연기란 과연 뭘까’라는 명제를 스스로 던지곤 한다. ‘연기를 해야 연기인가, 연기를 안 하는 게 연기인가?’ 혹은 ‘과연 연기를 장르로 나눌 수 있을까’ 등등. 정답은 아니지만, 내게 연기란 어떤 기술이나 학문이라기보다, 내가 맡은 캐릭터에 충실하려는 노력에 가깝다. 그렇게 접근하면 한결 연기하기 수월하더라(웃음).”

―차기작은 사극 괴수영화 ‘물괴’ 사극 액션 코미디 ‘조선명탐정3’(가제, 김석윤 감독)이다. 각각의 작품에 거는 기대가 있다면.
“‘물괴’는 CG로 완성될 괴물이 가장 기대된다. 촬영장에 없었던 괴물이 스크린 속에서 무시무시하게 보이려면, 무엇보다 배우들의 실감나는 리액션이 중요했다. ‘조선명탐정’ 시리즈(2011~)는 전작을 통해 무겁고 까칠한 이미지를 얻은 나와 관객을 친근하게 이어준 고마운 시리즈다. 제아무리 ‘전편만한 속편 없다’지만, 명실상부 한국의 대표적인 시리즈로 자리매김하도록 힘쓰고 있다. 벌써 어깨가 무겁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