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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튼튼한 안보 위에서 가능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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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호 31면

김진국 칼럼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그렇게 믿고 싶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의 ‘말 폭탄’이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그렇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자신만큼 “평화적 해법을 더 선호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상처가 곪아야 짜낼 수 있다.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고 허세를 부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거래의 달인인 트럼프 대통령의 수법이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정말 믿고 싶다.

전쟁은 반드시 피해야 하지만 #최악의 시나리오도 준비해야 #안보·평화 양자택일 문제 아니다 #핵은 남의 일 아닌 우리의 일 #정보력 있는지, 장기 전략 있는지 #위기 대응 능력은 있는지 불안

그래도 불안하다. 지나치게 조용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도발을 중단하고 대화의 길로 나오라”고 촉구한 뒤 입을 다물고 있다. 문 대통령에 이어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휴가를 떠났다. 괌에 한국 관광객이 넘친다고 미국 언론이 놀란다.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지만 이래도 되는 건지 불안하다.

가장 중요한 건 국민의 생명이다. 미국 중심의 외신을 보면 사람의 값이 다르게 매겨지는 걸 절감할 수 있다. 미국인이 한 명만 다쳐도 큰 뉴스가 되지만 아시아나 아프리카 심지어 중국인이 수십 명 죽어도 시선을 끌지 못한다. 우리의 무감각이 그것과는 달라야 한다.

전쟁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 지도자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준비해야 한다. 방어마저 포기할 순 없다. 전쟁 없이 이기거나, 공존하는 게 최선이지만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 때도 있다. 안보와 평화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안보 대통령을 자처했다. 후보 시절 그는 전쟁 위기설에 “걱정하지 마라”고 말했다. 그는 “철저한 위기관리와 굳건한 한·미동맹으로 전쟁을 막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그는 “대통령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어야 한다”면서 “그러나 평화는 강하고 튼튼한 안보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한국이 운전석에 앉겠다고 했다. 그러나 협상은 주고받는 것이다. 우리가 줄 것은 뭔가. 핵과 미사일을 포기할 만큼 큰 대가는 뭔가. 김정은 위원장이 ‘착한 아이’여서 잘 타이르면 들어줄 것이라고 믿는 건 아닐 게다.

문 대통령은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이를 해결할 힘이 없고, 합의를 끌어낼 힘도 없다”고 토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에게 “북한과 대화 시도는 해봤느냐”고 물었다. 그때 문 대통령은 “내가 제안한 대화의 본질은 남북적십자회담을 통한 이산가족상봉이라는 인도적 조치, 핫라인 복원을 통한 우발적 군사적 충돌을 막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두 가지를 시사한다. 하나는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의 대화론을 비현실적이라고 보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또 하나는 문 대통령이 운전하는 차가 미국을 태우지 않은 마을버스가 아니냐는 점이다.

문 대통령의 토로처럼 한국에 별 뾰족한 수단이 없다. 그렇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과 하나로 움직였다. 미리 충분히 조율했다. 김 전 대통령의 제안과 약속에 미국의 입장이 담겨 있었다. 북한이 문 대통령의 대화 제안에 ‘진정성’이 없다고 일축한 데는 그것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문 대통령은 “한국 주도로 핵 없는 한반도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말로만 되는 게 아니다. 정상회담 한 번 한다고 풀리는 것도 아니다. 준비 없는 정상회담은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 큰 전략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 특히 미국이나 유엔과 엇박자를 내서는 될 일이 없다.

불안한 것은 문재인 정부에 장기 전략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당장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부터 그렇다. 이미 배치된 것을 다시 꺼내 중국의 기대만 잔뜩 부풀렸다. 환경영향평가를 하려면 1년 이상 걸린다고 했다가 하루 만에 임시배치를 지시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가 하루이틀 사이에 생긴 게 아니다. 정보력이 있는지, 장기적인 전략이 있는지, 위기 대응 능력이 있는지 불안하다. 더구나 반대 시위에 밀려 전자파 측정 한 가지도 곤욕을 치렀다. 전쟁은 치를 수 있을까. 북한 미사일이 날아오면 대응할 수 있을까.

문 대통령은 “국방력의 압도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어가겠다”고 약속했다. 사드는 압도적인 국방력이 아니라 방어력이다. 일대일 대응은 꿈도 꾸지 못한다. 단지 북한이 타격 목표로 삼을까 두려워 방어무기 배치조차 막는다면 그냥 백기를 들자는 건지 답답하다.

핵은 남의 일이 아니다. 이번 위기가 마치 북한과 미국 사이의 갈등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강 건너 불구경처럼 관전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이 난다면 거기(한반도)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손을 떼면 남의 일이지만 우리는 피할 수 없다.

북한의 요구는 미국이 한반도에서 손을 떼라는 것이다. 거기에 대응하는 우리의 장기 전략은 뭔가. 주한미군을 보호할 사드 배치조차 거부하면서 미군을 붙잡아 놓을 수 있나. 미군이 물러가면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버리고 공존의 길을 택할까. 우리 스스로 방어 능력은 있는가.

궁극적으로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건 국민적 공감대다. 통일 이전이라도 평화적 공존을 해야 한다. 다시 전쟁을 치를 수는 없다. 다만 상황에 맞게 움직여야 한다. 대화는 상대의 행동에 응답하는 것이다. 좋아도 싫어도 함박웃음만 짓고 있으면 대화가 안 된다.

장기 전략이 있어야 한다. 우리 힘을 비축해야 한다. 그게 모자란다면 남의 힘이라도 빌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햇볕정책도 튼튼한 안보를 전제로 한다고 말했다. 튼튼한 안보가 대화와 평화를 거부하는 게 아니다.

내부 통합이 중요하다. 안보가 정권 따라 휘청거려서는 안 된다. 문 대통령은 안보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잘못된 메시지로 쓸데없는 오해와 갈등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없다.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jink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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