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보기 힘든 틸러슨, 유창한 영어 구사 고노, 언론 과시 즐기는 왕이…3인3색 ARF 외교열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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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은 한국과 북한을 포함, 주요국 외교 장관들이 참석해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는 무대다. 6~7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이번 행사에서 미·중·일 외교장관들은 독특한 스타일로 눈길을 끌었다.

◇얼굴 보기 힘들었던 미 국무장관=ARF에서 미 국무장관은 단연 많은 관심을 받는 거물급 참석자다. 그 간 미국은 ARF를 계기로 다양한 양자회담과 다자 행사를 소화하며 활발하게 참여해왔다. 북한이 참여하는 유일한 역내 안보 협의체인 만큼 미국의 대북 정책을 강조하고 지지를 확보하는 장으로도 삼았다. 지난 2015년 존 케리 당시 국무장관은 부상으로 목발을 짚고서도 종횡무진 행사장을 누비며 여러 장관들을 만났다.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회담 전 미소를 짓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회담 전 미소를 짓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하지만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다소 달랐다. 모든 ARF 회원국 장관들이 의장국이 준비해준 전통 의상을 입고 참석하는 갈라 만찬(6일)에 불참했다. 대신 수전 손턴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대행이 모습을 보였다. 틸러슨 장관이 오지 않은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다.

메인 행사격인 7일 ARF 비공개토론장에도, 8일 폐막식과 아세안 창설 50주년 기념 행사에도 틸러슨 장관은 참석하지 않았다. 두 행사에 오지 않은 이유는 다른 동남아 국가 방문을 위해 일찍 출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미국과 북한의 외교장관이 모두 참석하는 단 세 개의 공식 행사에 모두 불참한 것이라 외교가에서는 “노골적으로 북한을 무시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왔다. 틸러슨 장관이 워낙 언론 노출을 즐기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유창한 영어로 ‘깜짝 데뷔’ 일본 외상=지난 3일 취임한 고노 다로(河野太郞) 신임 일본 외상은 불과 사흘 뒤인 6일 마닐라에 도착해 외교전에 데뷔했다. 준비가 완전히 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유창한 영어로 눈길을 끌었다. 전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상이 회담에서 항상 순차 통역을 썼던 것과는 달랐다.

7일 열린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은 이례적으로 영어로만 진행됐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물론 고노 외상도 영어로 회담을 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회담에 배석했던 한 당국자는 “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도 고노 외상의 영어 실력이 훌륭해서 놀랐다”고 말했다.

출처: 고노 다로 페이스북

출처: 고노 다로 페이스북

3자회담은 46분 동안 진행됐다. 순차 통역이었다면 약 1시간30분 정도에 해당하는 회담을 한 셈이다. 회담 뒤 일본 외무성 당국자는 기자들과 만나 “대단하다. 통역 없이 생각하는 바를 영어로 전달해 정확성을 확보하고 시간도 절약했다”고 말했다. 또다른 외무성 당국자는 고노 외상이 6일 갈라 만찬에 앞서 북한 이용호 외무상과 대기실에서 잠시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을 소개하며 “영어로 납북자 문제를 제기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여전히 스포트라이트 즐기는 중국 외교부장=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언론의 접근이 차단된 메인 행사장인 필리핀국제컨벤션센터(PICC)에서만 기자회견을 두차례 했다. 매일 한 셈이다. 각국 기자들이 왕 부장의 기자회견을 핑계로 행사장에 들어가보겠다며 대거 신청, 조기에 등록이 마감되기도 했다.

왕 부장은 평소에도 여느 중국 외교관과는 다른 스타일로 유명하다. 그를 여러 차례 직접 만나본 한 외교관은 “중국 당국자들은 회담이나 회견 때 보통 서면으로 준비해온 내용을 충실히 읽는 데 집중하는데, 왕 부장은 자신의 언어로 상대방을 보면서 말하는 점이 다르다”고 귀띔했다.

발언하는 왕이 외교부장   (마닐라=연합뉴스) 김현태 기자 =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6일 오후(현지시간) 마닐라 시내 한 호텔에서 열린 한국-중국 외교장관회담에서 발언하고 있다. 2017.8.7   mtkht@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발언하는 왕이 외교부장  (마닐라=연합뉴스) 김현태 기자 =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6일 오후(현지시간) 마닐라 시내 한 호텔에서 열린 한국-중국 외교장관회담에서 발언하고 있다. 2017.8.7  mtkht@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6일 한·중 외교장관 회담 직후 한국 기자가 갑자기 다가가 회담 결과를 묻는 돌발 상황에도 왕 부장은 여유를 잃지 않고 술술 답변했다. “사드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막을 수 있겠느냐”는 발언도 이렇게 나왔다.

왕 부장이 갈라 만찬장에서 당초 이용호 외무상의 옆자리였다가 굳이 자리를 바꿔 이 외무상과 마주치지 않은 것도 화제가 됐다. 불과 한나절 전 북·중 외교장관회담에서는 “양국은 가까운 이웃”이라고 과시했으면서, ARF 회원국 장관들이 모두 지켜보는 갈라 만찬에서는 이 외무상과의 ‘다정한 투샷’을 피한 셈이다. 외교가 소식통은 “왕 부장의 화려한 행보는 올 가을 당대회를 앞두고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한 국내용 퍼포먼스 측면도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마닐라=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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