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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침략은 무효, 역사 몰라 위안부 할머니들이 대리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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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호 08면

‘일제 강제병합 무효화’ 연구하는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대한제국 본궁이었던 덕수궁 내 석어당 2층에서 이태진 교수가 “110여 년 전 대한제국 침략을 세계가 불법으로 판정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김경빈 기자

대한제국 본궁이었던 덕수궁 내 석어당 2층에서 이태진 교수가 “110여 년 전 대한제국 침략을 세계가 불법으로 판정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김경빈 기자

또 한 분의 위안부 할머니가 지난 23일 세상을 떠났다. 김군자 할머니의 타계로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는 37명이 됐다. ‘위안부 재협상’ 문제를 놓고 한·일 정부 사이에 긴장감이 돈다. 위안부 문제를 국제적으로 공론화해서 유리할 게 없어 보이는 일본이 팽팽하게 버티는 이유는 미국이 자신들을 지지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국제연맹·유엔 보고서 모두 #“을사늑약은 불법·무효 판정” #일본은 숨기고 한국은 모른 채 #국교 맺어 위안부 문제 지속 #일제의 순종 서명 위조 발견 #25년간 강제병합 무효화 앞장 #대한제국 폄하 역사 바로잡기

아닌 게 아니라 20세기에 미국은 한·일 관계에서 결정적 순간에 두 번 일본 편을 들었다. 첫 번째는 1905년 7월 29일 체결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대한제국과 필리핀의 식민지배를 일본과 미국이 서로 인정할 것을 몰래 약속했다. 러일전쟁이 그해 9월 일본의 승리로 끝나기 직전에 진행됐다. 이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미국에서 독립운동하던 시절에 미국을 압박한 요소이기도 하다. 1882년 조선과 미국 간에 체결한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을 미국이 위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美의 두 번째 배신

두 번째 배신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전쟁 배상 문제를 논의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1951)에서다. 우리에게는 결코 평화라고 할 수 없는 ‘평화조약’이었다. 당초 높은 배상금을 포함해 강력한 조치를 취할 예정이었던 미국은 일본의 책임 문제에 거의 침묵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국 공산당에 장제스 군대가 밀려 대만으로 쫓겨 가면서 미·소 냉전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일본을 키워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한 것이다.

이태진(74)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 같은 역사의 희생양이었던 위안부 할머니들이 지금도 대리전을 치르고 있다고 본다. 일본 침략의 불법성 문제가 정면으로 부각되지 못하는 가운데 위안부 문제가 이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인권과 여성 문제이기에 세계인들의 보편적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그는 “인권 문제를 넘어 식민지배의 강제성에 대한 역사인식을 확실히 하는 것이 근원적 해법”이라고 했다.

1910년 8월 ‘병합조약’의 한국어·일본어본 표지. 둘 다 같은 색깔·글씨로 되어 한 사람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글씨를 쓴 사람은 통감부 한국어 통역관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로 밝혀졌다. 통감부가 일방적으로 모든 조약문을 준비했고 대한제국 정부의 뜻은 없었다는 물증이다.

1910년 8월 ‘병합조약’의 한국어·일본어본 표지. 둘 다 같은 색깔·글씨로 되어 한 사람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글씨를 쓴 사람은 통감부 한국어 통역관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로 밝혀졌다. 통감부가 일방적으로 모든 조약문을 준비했고 대한제국 정부의 뜻은 없었다는 물증이다.

본래 조선시대 정치사를 전공했던 그가 일본 침략의 불법성 문제로 전공을 바꾼 것은 1992년이다. 그해 5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대한제국 공문서 정리 사업을 주관하던 중 일제의 통감부 직원들이 순종 황제의 조칙·법령 등의 결재 과정에 황제의 이름자 서명을 위조해서 처리한 문건 60여 점을 발견했다. 벌써 25년이 지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의 ‘강제병합 무효화’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1907년 8월 4일자 이탈리아 잡지. 실제 황제는 없고 환관이 대역으로 치른 순종(융희) 황제 양위식 모습이다. 용상에 앉은 환관, 이를 지켜보고 있는 일본군 고위 장교가 보인다. [사진 이태진]

1907년 8월 4일자 이탈리아 잡지. 실제 황제는 없고 환관이 대역으로 치른 순종(융희) 황제 양위식 모습이다. 용상에 앉은 환관, 이를 지켜보고 있는 일본군 고위 장교가 보인다. [사진 이태진]

일본 침략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출발한 연구는 대한제국에 대한 폄하로 일관된 일본의 역사왜곡 바로잡기로 나아갔다. 1995년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까치)으로 시작해 2000년 『고종시대의 재조명』(태학사)을 펴내며 한 획을 그었다. 지난해 펴낸 『일본의 한국병합 강제 연구』(지식산업사), 최근 출간한 『끝나지 않은 역사-식민지배 청산을 위한 역사인식』(태학사) 등이 그런 작업의 일환이다.

요즘도 러시아·프랑스·일본 등에서 공부한 후배 학자들과 정기적으로 모여 함께 강독과 토론을 계속하고 있다. 연이어 묵직한 연구서를 펴내는 이유를 묻자 “앞으로 연구할 시간도 별로 안 남은 것 같아 서두르려는 마음도 있고, 또 2015년 12월 28일의 한·일 양국 정부 간 ‘위안부 합의’ 같은 부실 사례가 나오는 상황을 개선하는 데 조금이라도 이바지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일본은 1948년 한국 정부 수립과 함께 기존의 조약은 무효가 됐다는 얘기를 줄곧 하고 있는데 그 말의 속뜻은 식민지배는 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 전제 아래 식민지배 때의 일은 일본에 잘못이 없다는 얘기죠. 그래서 일본 측의 위안부에 대한 해석이 뭐냐면, 조선 여자도 일본 신민으로서 천황과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견해 차이가 크죠. 이런 일본의 입장을 서포트하는 게 샌프란시스코 조약입니다. 1945년 8월 일본 천황이 항복 선언할 때만 해도 파시즘이 다시 등장해선 안 된다는 엄벌주의가 미국의 입장이었습니다. 배상금도 엄청 높게 책정되어 가고 있었죠. 48년 장제스 군이 마오쩌둥에게 밀려 대만으로 밀려가며 냉전체제가 되면서 미국이 큰일 났다고 생각했고,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고 또 미국의 세금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일본을 활용하려고 정책을 바꿉니다.”

역사는 예측대로 진행되지도 않을 뿐더러 더욱이 국제정치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문제는 후속 조치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당시 상황으로선 불가피한 것일 수 있죠. 그때 미국의 방침 변경은 동서 냉전의 상황논리입니다. 그 상황이 해소되면 수정을 해야죠. 그런데 한·일 관계를 조정할 힘이 있는 미국 정부는 그런 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한국은 한국대로 맥락을 정확히 짚으며 제대로 얘기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질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일본이 기고만장할 수 있는 겁니다.”

이 교수는 피해국인 우리가 1951년의 상황논리를 따를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계속 따지며 한·일 관계를 역사인식에서부터 다시 정립하려고 하는 이유다. 돈 문제는 배상금을 받았다고 쳐도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가혹성을 사죄하고 위안부 문제도 그 속에서 진정한 반성을 해야 정리가 된다는 것이다.

박근혜-아베 정부 간 ‘위안부 합의’ 문서는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문서가 아닌 구두일 듯합니다. 문서가 있으면 왜 안 내놓겠어요. 그 까닭이 짐작이 갑니다. 문서를 만들어 놓고 국가 예산으로 일정한 금액을 피해자들에게 지불하게 된다면 이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파생적 위험성에 대비해 ‘구두’ 합의 형식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 100년이 되던 2010년에 한·일 양국 지식인(한국 604명, 일본 540명)이 함께 한국 병합의 불법성을 지적한 공동성명서를 발표한 배경에는 이태진 교수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2015년에는 ‘한·일 그리고 세계 지식인 성명서’도 이끌어냈다. 하지만 오늘의 한·일 두 나라를 바라보는 그의 심정은 착잡하다.

가해자 일본은 치밀, 피해자 한국은 허술

“100여 년 전 역사에 대한 인식에서 오늘의 한국과 일본은 매우 대조적입니다. 한국은 100년 전의 역사를 실패한 역사로만 간주하며 군주에게 망국의 책임을 모두 지우고 있어요. 반면 일본은 제국주의 팽창의 근원이었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사상을 극대화해 미화·추숭하고 있습니다.”

올해 『끝나지 않은 역사』를 펴내며 가해자인 일본의 치밀함과 피해자인 한국의 허술함을 다시 또 절감해야 했다고 한다.

“1919년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파리에 대표부를 설치하고 영어가 능통한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해 일본의 강제병합을 호소하는데 그 노력이 1935년 국제연맹의 보고서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하버드대 법대 교수단의 이름으로 완성된 ‘조약법에 관한 보고서’는 1905년의 을사늑약을 역사상 효력이 발생할 수 없는 조약 세 개 중의 하나로 판정했습니다. 또 국제연맹을 계승해 1945년 창설된 국제연합이 1963년에 ‘조약법에 관한 보고서’를 새로 작성합니다. 여기에도 1905년의 을사늑약은 불법 무효로 판정했습니다.”

미국은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이런 사실을 알면서 은폐했다. 1965년 한·일 협상을 할 때 일본은 적어도 국제연합의 보고서는 존중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이 일본의 강제병합을 이미 불법으로 판정해 놓았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 같은 은폐와 무지는 지금도 위안부 문제로 계속되고 있다.


대한제국 본궁 덕수궁, 고종의 근대화 계획 보여줘

지난 5월 24일 덕수궁에서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기념하는 이태진 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주제는 ‘덕수궁, 누가 왜 지었는가?’. 대한제국의 성립과 배경 그리고 대한제국 황궁으로서 덕수궁의 의미를 밝히는 내용이었다. 250여 명의 참석자 가운데에는 덕수궁(경운궁)이 대한제국의 본궁이었는지를 모르는 이도 많았다.

덕수궁은 고종의 근대화 계획을 잘 보여준다. 이전의 궁들이 전통적인 군주 남면설(南面說)에 따라 북쪽 산 밑에 배치된 것에 비하면 덕수궁의 배치는 파격적이었다. 선원전과 중화전을 축으로 서편에는 서양식 건물, 동편에는 한식 건물을 배치했다. 전통을 계승하면서 동서 문명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려는 의지가 담긴 설계였다. 고종은 서울 도시개조 사업도 추진하는데, 전통적인 구조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서양의 최신 방사형 도로 체계를 대한문 앞에 도입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임시정부 때만 해도 대한제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없었다. 국호를 제정할 때 대한제국 승계의 뜻으로 대한민국이라고 하자는 제안이 절대다수로 채택됐다. 고종이 무능했다는 인식은 일본에 의한 왜곡인 경우가 많다.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종과 대한제국을 폄하해야 했던 것이다. 강연이 끝나고 ‘이런 얘기를 왜 지금 와서 듣게 되는가’라고 질문하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고종이 동학 진압을 위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는 얘기도 꾸며낸 것임은 2000년 펴낸 『고종시대의 재조명』에서 밝혀냈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머물던 원세개가 조선 민중의 원성을 누르기 위해 요청했으며, 고종은 오히려 반대했다고 한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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