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의회 증인 나서고 2억6000만원 기부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 세상 떠나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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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집 할머니 김군자 할머니 생전모습 [중앙포토]

나눔의집 할머니 김군자 할머니 생전모습 [중앙포토]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짓밟힌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삶이 불쌍하고 억울하다. 살아있는 동안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아내고 싶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받아내고 싶다" 소망 #미 의회에서 일본군의 끔찍한 과거사 증언한 인물 #정부 지원 생활비 등 틈틈이 모아 기부한 천사 #文대통령, 대표시절 방문때 '엄지 척'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한 명인 김군자(사진) 할머니가 평소 입버릇처럼 한 말이다. 그는 이 같은 평생 소망을 가슴에 묻은 채 23일 오전 8시 4분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

김 할머니는 전날(22일)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했다고 한다.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를 탔지만, 나눔의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피해 할머니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거실에서 TV도 시청했다. 갑작스러운 별세에 나눔의집은 슬픔에 잠겼다.

김 할머니는 1926년 강원도 평창에서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琿春) 위안소로 강제동원됐다. 당시 17살의 꽃 같은 나이였다.

정현백 신임 여성가족부 장관(오른쪽)이 10일 오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쉼터 나눔의집을 방문해 김군자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다. [연합뉴스]

정현백 신임 여성가족부 장관(오른쪽)이 10일 오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쉼터 나눔의집을 방문해 김군자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군 '성 노리개'를 벗어나려 몇 번의 탈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그때마다 가혹한 구타를 당했다. 구타 후유증에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 장애를 안고 살았다. 강제동원 기간 수차례 극단적인 선택도 했다.

광복되고 난 후에야 꿈에 그리던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약혼자 등 사랑하는 이들을 차례로 잃은 김 할머니는 1998년 나눔의집에서 생활했다.

김 할머니는 미 의회 청문회에서 끔찍했던 과거사를 생생히 증언하며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그는 2007년 2월 마이크 혼다 미국 연방하원이 주최한 미국 의회의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 나서 “위안소에서 하루 40여 명을 상대했고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기부 천사로도 알려졌다. 평소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생활 지원금 등을 모아 “ 저처럼 부모 없는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써달라”며 기부를 주저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 사과와 정당한 배상을 받으면 이 역시 사회에 기부할 계획이었다. 일본 정부가 출연한 ‘화해치유재단’의 치유금 수령은 거절했다.

김 할머니는 매월 200만원 가량 정부 지원 생활비 등이 모이는 대로 아름다운 재단에 1억원, 나눔의 집에 1000만원, 퇴촌 성당에 1억 5000만원 등을 각각 기부했다.또 매주 수요 집회에 나가 위안부 실상을 알리는 데에도 앞장섰다.

문재인 당시 더민주 대표에게 엄지를 들어보이는 김군자 할머니. [중앙포토]

문재인 당시 더민주 대표에게 엄지를 들어보이는 김군자 할머니. [중앙포토]

김 할머니는 문재인 대통령 당선을 누구보다 환영했다고 한다. 인연은 2015년 12월 31일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였던 문 대통령이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할머니들을 위로 방문한 게 계기가 됐다. 김 할머니는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를 비판한 문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최고라는 의미로 엄지를 추켜 세웠다.

김 할머니의 빈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차병원 지하 1층 특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25일이며 장지는 나눔의 집 추모공원이다. 김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9명 가운데 생존자는 37명으로 줄었다.

경기도 광주=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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