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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장 '힙하다'는 성수동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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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9호 31면

홍은택 칼럼

이날은 드물게 아무 일정이 없는 날이었다. 회의도 없고, 약속도 없고, 내 머리 속도 텅 비어있었다. 그냥 유령처럼 앉아 있을까 하다가 성수동이 떠올랐다. 몇년 전, 한 젊은 직원이 퇴사하면서 한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름 안정된 직장인데 관두고 성수동으로 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새 성수동이 힙해요”라고 했다. 힙하다는 게 뭐냐 물어보면 내가 힙하지 않아보일까 봐 참았다. 쿨하다, 핫하다, 멋지다 이런 거랑 뭐가 다른 건지. 이제 성수동으로 가서 확인할 때다.

천연 비누·패션소품·점자 소품… #소규모 소셜벤처, 가족기업 즐비 #맛집, 화려한 패션 거리와는 달리 #젊고 건강한 진심의 연대 공간

첫 행선지는 성수동 맞은편 군자동에 있는 바닐라베리. 비좁은 골목을 헤집고 들어가자 주택가 한 가운데 갑자기 핑크빛 쇼윈도가 나타났다. 바닐라베리는 아로마 테라피에 따른 천연비누를 만든다. 바닐라인 김정근씨와 베리인 일곱살 많은 친누나 김상미씨의 2인 기업이다. 김상미씨가 피부질환을 앓던 남편을 위해 만들어본 천연비누가 효과가 있는 것을 보고 차츰 사업을 키워왔다.

이런 가족기업들이 제법 있다. 패션소품을 만드는 씨스앤브로는 각자 다른 길을 걷던 3남매가 힘을 합쳤다. 드로브로스는 신경외과 의사가 설계한 인체공학 제품을 동생이 만들어 판다. 자매가 ‘쓸데 없지만 재밌는 소품’을 만든다는 자매상점도 있다. 차 한잔 얻어 마시니 밥 때가 됐다. 서울숲 근처에 있는 소녀방앗간으로 향한다. 경북 청송에 있는 할머니들이 뜯어온 나물로 밥을 지어 파는 곳이다. 식당에 들어서자 이런 글이 걸개에 적혀 있다.

“할머니들은 수많은 풀들 사이에서 먹을 것들만 똑똑 끊어서 삶고, 말리고, 데쳐 나물찬을 내지요. 수십 해의 봄마다 보들보들 피어난 산나물들을 뜯어 삶을 지탱해 왔습니다.”

할머니들의 수고와 정성이 전해졌는지 식당은 만석이어서 골방 같은 데 비집고 앉았다. 도토리묵 무침과 들깨도라지, 깎두기 그리고 된장국과 함께 산나물밥이 나왔다. 저염식단이어서 슴슴하다. 평양냉면의 밍밍함처럼 전복적인 맛이다.

소녀방앗간 뒤쪽에 있는 주택가에는 8~90년대 지어진 연립주택들이 즐비한데 이곳에 소셜벤처들이 하나 둘 자리잡고 있다. 이중 도트윈은 점자 가죽소품을 만드는 곳. 종이창고였던 지하1층을 공방겸 사무실로 쓰고 있는데 철제문 밖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우리는 진짜를 만든다. 그리고 부끄럽지 않은 일을 한다.’

지하인데도 습하지 않고 안온하다. 도트윈은 점자를 의미하는 도트와 사이를 의미하는 비트윈을 합친 이름이다. 박재형·박재성 쌍둥이형제는 19세이던 6년 전 시각장애인이 공동체의 일원임을 알려주기 위해 이 사업을 발표했다. (그러고 보니 이 회사도 가족기업이네.) 점자 가죽지갑은 진심을 전하기에 알맞아서 선물용으로 인기가 있다.

박재형씨는 소셜벤처라고 해서 명분만 내세우던 시기가 지나 지금은 세련되고 품질이 뛰어난 제품들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디자인을 통해 사회혁신을 실현하는 꿈을 꾸고 있다.

도트윈을 나와 성수동 일대를 차로 한 바퀴 돌아보니 ‘한국의 브루클린’이라고 하기에는 아직은 수용능력을 초과한 대도시의 비좁고 소란스러운 부도심의 느낌이 강했다. 성수동이 브루클린처럼 도심재생이 진행되려면 구두공장이 살아나야 한다. 뚝섬역 부근의 카페 수다에서 성수수제화협동조합의 박경진 대표를 만났다. 수다는 ‘수제화의 꽃이 피었습니다’의 준말인데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듯했다. 실내의 세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구두와 신발들은 아직 임자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 박 대표는 “몇 년 전만 해도 500곳이 넘는 구두와 부자재공장들이 있는데 지금은 300곳도 안 된다”고 말했다. 30년 장인이 만드는 구두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 조합은 최근 크리스진이라는 공동 브랜드를 만들면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성수동 ‘땡땡이’에서 가장 놀란 곳은 마지막으로 들른 동구밭이었다. 성수동에서도 변두리인 아랫동네에 있었다. 당구장이었던 지하공장에 들어서자마자 흰 비누들을 빼곡히 담은 녹색 플라스틱 상자들이 키 높이보다 더 높게 켜켜이 쌓여 있고 유황냄새와 허브향이 뒤섞인 향이 코를 찔렀다.

젊은이들이 마치 회의하는 것처럼 길다란 탁자에 둘러앉아 웃고 떠들면서 일하고 있다. 동구밭은 발달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함께 텃밭을 일궈 재배한 바질·상추와 같은 식물을 원료로 천연비누를 만든다. 사업을 시작한지 2년도 안 됐는데 한 달에 10만 개의 비누를 생산할 수 있는 공정을 만든 것. 대학 4학년생인 노순호 대표는 “발달장애인들의 고용을 늘리는 게 목표인 만큼 일단 고용부터 하고 일감을 찾아나선다”고 한다. 넉살 좋게 생긴 노 대표는 비누는 성분을 정확히 배합하고 숙성이나 제조시간을 지키는 게 중요한 데 발달장애인이 이 점에서 강점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오히려 제일 힘들어 하는 말들이 ‘적당히 섞어’ ‘대충 해’ 이런 모호한 말이라고. 노 대표는 “정직한 사람들이 정직한 성분으로 정직하게 만드니 이 비누가 좋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껄껄 웃었다.

그는 외진 곳이라도 꼭 성수동에 자리를 잡고 싶었다고 말했다. 다른 소셜벤처들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해서 패션소품으로 종군위안부 할머니를 기리는 마리몬드와도, 정직한 성분으로 치약을 만드는 위드마이와도, 언니네 파우치와도 콜라보한 제품들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성수동이 힙하다는 느낌이 왔다. 확실히 없던 흐름이다. 맛집이나 패션, 화려한 건물로 동네가 핫다는 것과는 다르다. 뭔가 젊다. 새롭다. 건강하다. 그리고 진심이 느껴진다. 보이지 않는 진심의 연대 같은 곳, 그것이 젊은 직원을 불러들인 힙함의 이유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홍은택
카카오메이커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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