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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교육정책의 연착륙 전략이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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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신호 전 교육부 차관

김신호 전 교육부 차관

문재인 정부의 주요 교육정책 공약은 자사고와 특목고(외고·국제고) 폐지, 내신 및 수능 절대평가 전환, 대입제도 단순화, 중·고교 국가수준학업성취도 폐지, 고교 의무교육화, 대학 서열화 해소 등으로 하나같이 파격적이다. 그동안 역대 정권들이 검증되지 않은 교육공약을 무리하게 추진해 혁신은커녕 시행착오로 교육에 해독만 끼친 사례도 적지 않아 노파심을 갖게 한다.

문재인 정부의 교육정책 공약 #명분 있고 필요성은 인정되나 #교육현장 섬세하게 이해하고 #시행착오 최소화한 처방 필요

우선 자사고와 특목고(외고·국제고) 폐지에 대해서는 교육계 저변의 공감도가 높다. 학교 선택권 확대와 수월성 교육 강화라는 명분 아래 추진된 이명박 정부의 ‘고교 다양화 정책’은 고등학교의 인위적 서열화를 조장하고 일반고를 몰락시킨 실패한 정책이란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특목고와 자사고 폐지 수순을 밟는다고 할지라도 법과 기준에 충실한지, 예상되는 교육적 피해는 없는지, 일반고 전환으로 발생할 예산 소요는 없는지 꼼꼼히 따져 봐야 한다. 또한 일선 학교와 학부모에게 미칠 충격과 갈등을 최소화하고 공감을 전제로 연착륙을 꾀해야 한다.

내신과 수능 절대평가 전환에 대해서는 엇갈린 반응이다. 그러나 초·중·고의 학업성취도 평가는 학생의 학습목표 도달 수준 확인을 목적으로 하므로 성취평가제(절대평가제) 채택이 타당하며, 대입 전형을 위한 고교 내신도 절대기준에 따라 A~E로 나눠 기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되면 상대적 내신 석차로 인한 학생들의 과도한 스트레스와 지나친 경쟁도 완화할 수 있다. 수능 절대평가 전환에 대해서는 우려의 시각이 일부 존재한다. 수능은 본래 ‘대학수학준비도를 평가하는 적성시험’으로서 대학수학을 위한 최소 능력(Minimum Competency)을 확인하는 기능이 우선하지만 대입 선발을 위한 평가로서의 변별적 기능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입제도를 학생부전형(교과전형과 종합전형)과 수능으로 단순화하고 논술전형과 특기자전형을 폐지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대입 준비를 위한 지나친 학업 부담과 사교육비 경감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수시와 정시에 무엇을 전형하고 학생부 내용의 무엇을 평가할 것인가는 대학 자율에 맡기는 게 옳다.

초등학교에 이어 중·고교 국가수준학업성취도 평가를 폐지한다는 것은 매우 걱정되는 실험이다. 국가수준에서의 타당도와 신뢰도가 검증되고 표준화된 평가 없이 어떻게 학생 개개인의 학업성취도를 정확하게 확인하고 피드백하며 학업의 진보·발전을 모니터링할 수 있는가. 평가는 학습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에 평가 없이 학습 진보와 기초학력 보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국가수준학업성취도 평가를 표집 평가로 대신하자는 주장도 온당치 않다. 평가는 ‘어떤 상태나 수행 결과에 대한 가치 판단이나 의사 결정을 위한 정보 수집의 과정’이기 때문에 표집 평가보다는 전집 평가가 학생 개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에 대해 더 정확하고 세세한 정보를 더 많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표집 평가는 한정된 정보만 제공하기 때문에 전체적 경향을 파악하는 경우에만 활용된다. 미국·영국·일본 등 대부분의 선진국이 전집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고등학교 의무교육화는 언젠가는 실현돼야 할 과제로 반가운 일이다. 유·초·중·고 보통교육은 국민 생활에 필요한 기본교육이며 상위 학습을 위한 기초교육이므로 국민에게 의무로 부과하되 국가가 책임지는 게 마땅하다. 앞으로 고교 무상교육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입학금·수업료·교과서 등의 무상화를 실현해야 할 텐데 한 해 약 2조4000억원으로 추산되는 소요 예산 재원대책이 선결돼야 할 것이다.

정부가 대학 서열화 해소를 인위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헌법 31조 4항이 규정하고 있는 교육의 자주성과 대학의 자율성 보장은 대학에 대한 공권력 등 외부 세력의 간섭을 배제하고 대학을 자주적으로 운영하도록 해 대학이 갖는 기능을 충실히 발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는 학문의 자유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자 대학에 부여한 헌법상의 기본권이다.

정부는 국가수준의 정책 기획과 집행, 행·재정적 지원, 경영 평가, 감사만 하고 대학총장에게 자율권과 재량권을 대폭 허용하되 책임을 지도록 해 창의적 경영을 유도해야 한다. 또 대학의 구조 개혁과 체질 개선을 위해 정부가 직접 개입하기보다는 대학의 자율적 특성화와 창의적 경영전략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스스로 강화하고, 상아탑으로서의 공익적 책무를 감당하며, 상생공존하는 건강한 고등교육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지원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새 정부의 교육정책은 경쟁 완화와 사교육비 경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경쟁 완화와 사교육비 경감이 교육의 본질이나 궁극적 지향점이 될 수는 없다. 역대 정부들이 잘못된 교육정책 추진으로 교육을 후퇴시키고 국민에게 고통과 피해를 준 사례를 많이 봐 왔다.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정책에 한 치의 시행착오도 허용돼서는 안 된다.

김신호 전 교육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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