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소득격차 해소 정책의 함정 "남미선 성장 막아 격차 더 확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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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화두는 ‘경제 민주주의’다. 문 대통령은 지난 10일 6·10 민주항쟁 기념사에서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취임 이후 첫 국회 시정연설에서 문 대통령은 경제 민주주의 지향점으로 양극화 해소를 내세웠다. 그는 “‘경제 불평등’ 정도는 이미 세계적으로 심각한 수준이다. 미국보다 더 심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편성해서라도 고용을 개선하고 ‘소득 격차’가 더 커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소득 불평등 완화는 필요하지만 #분배 위해 고소득자 세금 늘릴 땐 #중,상위층 의욕 꺾어 성장 저해 우려 #대기업과 중기 벤처 함께 클 수 있게 #불필요한 규제 줄이는 정책 필요 #기술혁신 통해 불평등 완화해야

양극화 현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대표적인 용어는 ‘소득 불평등’과 ‘소득 격차’다. 모두 한 사회의 소득이 고르게 분포되지 않음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비슷한 뜻으로 읽혀 혼용되고 있다.

‘소득 불평등’이라는 용어는 1980년대 유럽에서 소득 계층이 상류층과 빈곤층으로 이분화돼 중산층이 몰락하는 현상을 우려해 등장한 ‘소득 양극화’에서 비롯된 말이다. ‘소득 격차’는 부자와 빈자의 소득 차이를 뜻하는 말로 절대적인 소득 불평등을 의미한다.

문 대통령도 시정연설에서 소득 불평등과 소득 격차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양 단어의 뜻을 명확하게 나누진 않았다.

하지만 이를 엄밀히 구분해야 한국의 분배 실태에 대한 진단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소득분포 진단을 제대로 해야 현실에 맞는 정책을 입안하고 펼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예를 들었다. “소득 불평등도를 해소하고자 한다면 조세 정책의 분배 구조를 살펴 지니계수를 낮추려는 시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반면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의 소득 격차를 줄이려면 부유세 등을 통해 격차를 감소시키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이 설명은 정부가 양극화 해소를 위해 상대적인 소득 불평등 해소에 집중해야 할지, 절대적인 소득 격차를 줄여야 할지 전략을 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를 위해선 현재 한국 사회의 불평등도 현황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한국, 소득격차 커졌지만 불평등도는 줄어 

예컨대 이렇다. 다섯 명으로 구성된 한 사회의 소득분포가 A(1, 2, 3, 4, 5) 형태라고 가정하자. 하위 20%의 소득은 1이고, 상위 20%의 소득은 5다. 각 계층의 소득이 배가 증가해 B(2, 4, 6, 8, 10)가 됐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 상대적인 불평등도는 변함이 없다. 불평등 정도를 보여주는 대표적 지표인 지니계수는 상대적 불평등을 측정한다. 지니계수는 0(완전평등)에서 1(완전불평등) 사이의 값을 가지는데, 1에 가까울수록 소득 불평등이 크다는 의미다. 모든 계층의 소득이 배로 늘어 소득 분포가 A에서 B로 된다면 지니계수의 변화는 사실상 없다. 경제 불평등 기준으로는 분배 수준이 나빠지지 않은 셈이다.

소득 격차로 따지면 달라진다. 소득 최상위 계층과 최하위 계층이 가진 부의 절대적 차이는 늘었기 때문이다. A는 4(5-1)인데, B는 8(10-2)이 된다. 각 계층의 소득이 함께 100% 늘었지만 격차는 벌어진 것이다.

2014~2015년 한국 사회의 소득 불평등과 소득 격차는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2015년 지니계수(처분가능소득 기준)는 0.295로 2014년(0.302)보다 불평등 수준이 호전됐다.

하지만 소득 격차는 벌어졌다. 가구당 소득 수준별로 상위 20%와 하위 20% 간 차이는 2014년 4627만원에서 2015년 4718만원으로 늘었다.

최하위 계층과 최상위 계층 간 소득 차를 줄이려면 최하위 계층의 소득을 끌어올리거나 최상위 계층의 소득을 끌어내려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최하위 계층의 소득 상승 폭이 최상위 계층의 소득 상승 폭보다 커야 한다.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정책으로는 최상위 계층에서 세금을 많이 걷는 ‘부유세’를 들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검토하는 세제 개편안의 하나다. 문재인 정부가 공약한 최저임금 인상 역시 같은 정책으로 볼 수 있다. 임금 차이를 줄여 소득 격차 폭을 줄이자는 아이디어다.

문제는 절대적 소득 격차만 강조해 정책의 촛점을 격차 해소에만 두면 상위 및 중위 계층의 의욕을 꺾어 성장을 훼손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는 점이다.

표학길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효율을 중시하는 경제와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이질적인 성격”이라며 “소득 하위 계층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건 바람직하지만 평등적인 요소를 강조하다 자칫 중상위 계층의 경쟁력을 하락시켜 경제 전체의 효율이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4차 산업혁명, 상대적 불평등 심화시킬수도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특임교수는 “격차를 줄이기 위한 분배 위주 정책을 펴면 단기적으로 여론의 호응을 얻을 수 있지만 성장은 저하되고 소득 격차는 오히려 더 확대된 사례를 남아메리카 등의 국가에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성장을 통해 부의 분배가 고르게 분포되더라도 계층 간 기본 바탕이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소득 차이는 벌어질 수 있다”며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사회 전체의 부가 늘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성장 활력을 키워 모든 계층이 고르게 성장하는 상대적 소득 불평등 해소에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이마저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은 자칫 상대적인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유병규 산업연구원장은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신기술에 체화된 개인들은 생산성이 높아져 일확천금을 벌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신기술과 거리가 먼 개인은 생산성이 낮아져 상대적 불평등은 더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해법으론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벤처기업 등도 혁신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온다.

유 원장은 “격차 해소에 치중하더라도 생산성을 키우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며 “대기업뿐 아니라 벤처기업 등에서도 기술 혁신이 가능하도록 여건을 마련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경제 불평등 확대를 완화하기 위해 사회적 안전망을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하남현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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