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당했어요" 다급한 신고에 지급정지한 계좌, 알고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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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바쁘신데 죄송한데요. 제가 방금 보이스피싱 당한 거 같아서 빨리 신고 좀 하려고요. 방금 입금했거든요?"

지급정지 계좌, 알고보니 도박사이트 계좌 #조직폭력배 일당, 금융사에 820회 허위신고 #지급정지 해제 조건으로 7억원 돈 뜯어내

지난 2012년 11월 금융회사 N사의 콜센터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한 남성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친한 친구가 갑자기 메신저에 접속해서 사고 났다고 돈 좀 빌려달라 하길래 30만원 바로 보내줬는데 친구가 자긴 접속한 적이 없대요." 직원의 확인절차가 더디자 짜증도 냈다. "빨리 좀 해줘요. 돌아버리겠네…." 남성의 입금 내역을 확인한 직원은 해당 계좌를 정지시켰다.

뒤늦게 경찰이 확인한 결과 이 계좌는 한 불법 도박사이트의 운영 계좌였다. 보이스피싱 피해도 없었다.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며 금융기관에 불법 도박사이트 계좌를 허위 신고한 뒤 이를 빌미로 도박사이트 운영자에게 수억 원의 돈을 뜯어낸 조직폭력배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이같은 범행을 저지른 19명을 검거해 그중 박모(30)씨 등 4명을 구속했다고 22일 밝혔다.

전남 목포에서 활동하는 조폭 A파와 B파 소속인 박씨 일당은 2012년 7월부터 지난 1월까지 고객을 가장해 불법 도박사이트에 접근, 해당 사이트가 운영하는 계좌를 받았다. 당시 6개월 간 금융사에 근무한 박씨가 범행에 사용할 타인의 계좌정보를 몰래 빼내기도 했다. 피의자들은 그 계좌들에 소액을 미리 입금한 뒤 금융사에는 '보이스피싱을 당했다'고 속였다. 그렇게 800여 개 계좌를 지급정지시켰다.

실제로 보이스피싱 사건이 발생했을 때 신고 접수기관은 피해금액이 인출되지 않도록 계좌를 지급정지하는 게 가장 시급한 업무다. 그래서 피해자가 계좌에 입금한 내역만 확인되면 액수에 상관 없이 계좌를 정지시킨다. 피의자들은 이 점을 악용한 것이다.

피의자들의 범행 방식.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

피의자들의 범행 방식.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

박씨 일당은 계좌를 지급정지시킨 뒤 도박사이트 운영자들에게 이를 해제하는 조건으로 협박해 5억여 원을 받아냈다. 도박에 1억원을 베팅한 후 대출사기를 당했다며 피해구제를 신청해 6000만원을 환급받는 대담함도 보였다.

경찰에 따르면 각각의 범행기간은 조금씩 다르지만 피의자들은 5년 간 전국 각지에서 820회 가량 지급정지를 신청했다. 1인 최대 신고 건수는 178회, 하루에 많게는 3번까지 신고를 했다. 그만큼 피의자들의 범행은 체계적이었다. 같은 지역 조폭이던 A·B파 일원들은 각각 지급정지팀을 결성해 모텔과 아파트에 합숙했다. 이들 사이에서도 도박사이트 정보 입수·지급정지·협박·인출책 등으로 역할을 세분화 했다.

경찰 관계자는 "허위신고는 금융기관 등의 행정력 낭비는 물론 촌각을 다투는 실제 피해자들에 대한 대응이 지연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유흥업소 및 서민 상대 갈취·집단난동 등 전통적인 불법 행위에서 벗어나 소규모로 활동하며 사회 제도의 빈틈을 악용하고 있는 조폭들의 지능화 경향을 보여준 사례다"고 말했다.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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