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적 성격' 직장인의 자살… '업무상 재해' 인정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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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로 인한 스트레스에 남들보다 취약한 내성적 성격의 근로자가 자살을 택한 경우에도 업무상 재해로 인정될 수 있을까.

최근 대법원과 하급심 법원은 업무상 재해로 볼 수 있다는 판결을 잇따라 내놨다. 개인의 성격이 자살에 영향을 미쳤다 하더라도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과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만 입증된다면 업무상 재해로 볼 수 있다는 취지다.

◇근무 중에 목맨 은행지점장...대법 파기 환송

대법원 2부(주심 김창석 대법관)는 업무 스트레스로 우울증을 앓다가 근무 중 자살한 은행 지점장 김모씨의 유족이 “업무상 재해를 인정해달라”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8일 밝혔다.

대법원은 지난 2012년 유사한 사건에 대해 "우울증을 앓게 된 주요 원인이 내성적이면서 꼼꼼한 성격, 지나친 책임의심과 예민함 등 개인적 소인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업무상 재해를 부인한 적도 있어 법조계에선 "대법원이 전향적 결론을 냈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씨는 2013년 6월 근무시간 중 농약을 마시고 목을 매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같은 해 1월 지점장으로 부임한 김씨는 여ㆍ수신 영업, 고객 관리 총괄하는 업무를 맡은 뒤 실적 부진과 대출고객의 금리 인하 요구 등으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변에 호소했다.

평소 김씨는 실적 스트레스를 주변에 호소하다가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중앙포토]

평소 김씨는 실적 스트레스를 주변에 호소하다가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중앙포토]

유족들은  “영업실적 등에 대한 스트레스로 우울증을 앓다가 자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단 측과 1·2심 법원은 "김씨의 사망이 꼭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 때문이라고 볼 근거가 부족하다"며 유족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급심 판단에는 "다소 강박적이고 완벽주의적인 성향"이라는 병원 측의 진단과 업무 부진으로 인한 징계를 받거나 업무 부담이 다른 지점에 비해 유난히 크다고 볼 수 없다는 점 등이 크게 작용했다.

이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업무 스트레스를 받아들이는 김씨의 내성적인 성격 등 개인적인 취약성이 자살에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업무와 사망 사이의 관계가 달라지지 않는다”며 “김씨가 영업실적에 상당한 중압감을 느껴 지점장 부임 4개월 만에 우울증을 진단받았고 정신과 치료를 받아도 증세가 급격히 악화됐던 점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욕설 질책 받은 명문대 출신 건축학도의 잘못된 선택

입사한 지 1년여 만에 공사 현장에서 자살한 건설업체 사원 황모씨도 비슷한 경우다. 서울의 한 명문 대학에서 건축 공학을 전공한 황모씨는 지난 2013년 1월 모 건설회사에 취업해 아파트 하자보수 업무를 맡았다. 내성적 성격의 황씨는 입주자들의 지속적인 항의와 하자보수 요구에 제대로 응대하지 못해 상사들에게 욕설섞인 질책을 받던 황씨는 극도의 불안감을 호소했다.

자신의 페이스북에 “입주자들의 답 안 나오는 하자처리 요구와 오지 않는 작업자들 덕분에 하루하루 불안에 떨며 잠 못자고” “아파트 AS 얼른 벗어나고 싶다 ㅠㅠ 살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불안감...” 등의 글을 올리기도 했던 황씨는 병원에 도움을 구해보지도 않은 채 공사현장에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에는 “말, 사람 너무 어렵다. 죄송합니다.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란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근로복지공단 측은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병력에 대한 증명이 없고 황씨의 내성적 성격이 영향을 미쳤다는 이유로 유족들의 급여 청구를 거부했다. 그러나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부장 하태흥)는 지난 9일 “업무상 재해로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비록 황씨에게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은 구체적인 병력이 없고 내성적인 성격 등 개인적인 취약성이 자살에 이르는 데 일부 영향을 미쳤을 수 있지만 업무 수행으로 중압감에 시달리고 좌절감을 느끼면서 자존감이 많이 떨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명확한 판례 변경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업무상 스트레스를 자살의 원인을 폭넓게 인정하려는 게 최근의 판결 추세"라고 말했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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