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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부, 53년에 한은 감독에서 벗어난 산업은행 설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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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호 21면

[중앙은행 오디세이] 부활한 일본식 관치금융

전쟁 중 심한 폭격으로 손상된 한국은행 본점 건물(현재 화폐박물관)을 복구하는 공사가 1954년부터 진행됐다. 이 와중에 재무부는 한국은행의 은행감독 권한을 회수하려는 시도를 전개했다. [국가기록원]

전쟁 중 심한 폭격으로 손상된 한국은행 본점 건물(현재 화폐박물관)을 복구하는 공사가 1954년부터 진행됐다. 이 와중에 재무부는 한국은행의 은행감독 권한을 회수하려는 시도를 전개했다. [국가기록원]

극심한 자금난 때문에 법정관리로 갈 것 같던 대우조선해양이 위기를 넘겼다. 만기 채권의 일부를 주식으로 전환하고 나머지는 만기를 연장해 재투자하도록 정부가 채권기관들을 설득한 결과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관치(官治)’라고 불평하지만, 민간과 시장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 정부의 존재 이유다. 미국 재무부도 1989년 중남미 국가들이 줄줄이 부도위기를 맞았을 때 전 세계 채권기관들을 전부 불러들여 채무재조정을 주도함으로써 국제금융시장의 파국을 막았다(브래디 플랜). 그런 점에서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한은에 은행감독권 주는 것 방해 #산은법 제정 동의받고야 넘겨줘 #중앙은행 통제 벗어난 특수은행 #정부의 금융시장 개입 수단으로

하지만 우리나라의 관치는 그 역사가 유구하고 강도가 너무 세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재무과는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 뿐만 아니라 일반 상업은행의 일상 경영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이 같은 체계는 미 군정청을 거쳐 과도정부까지 이어졌다. 당시 재무부 직원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일본식 금융시스템을 유지하려고 했다. 즉 발권전문은행(한국중앙은행)·산업금융전문은행(한국식산은행)·외환전문은행(한국환금은행)·서민은행(국민협동은행) 등 분야별 국책은행을 설립하고 이들 4개 국책은행을 일반은행과 함께 정부가 감독하는, ‘분할관치(divide and rule)’ 시스템을 구상했다(금융법규대강 초안, 1948년 3월).

은행법 놔두고 조선총독부 은행령 적용

하지만 일제 때 통화정책이라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재무부 직원들의 생각은 수준 미달이었다. 우선 재무부 보고서에 언급된 ‘한국중앙은행’은 중앙은행이 아니었다. 회계 상으로는 독립했지만 법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부조직인 발권청에 가까웠다. 미국에서 공부한 이승만 대통령과 김도연 재무장관, 최순주 조선은행 총재는 그 보고서를 폐기하는 대신 미국의 금융전문가들을 초빙해서 미국식 금융시스템을 도입키로 했다(2016년 4월 17일자 참조).

이런 배경 속에서 만들어진 한국은행법은 한국은행을 금융시스템의 최정점에 두었다. 정부가 관리해 오던 환금은행은 한국은행 외국부로 흡수됐다(제39조). 정부의 은행감독업무 역시 한국은행의 은행감독부로 흡수됐다(제28조). 재무부 직원들은 긴장감 속에서 자신들의 권한을 지키기 위한 방법들을 찾았다. 은행법 시행을 연기하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한은법과 은행법은 같은 날 제정됐지만, 은행법 시행은 늦춰졌다. 그 법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에는 은행들이 너무 부실하다는 이유였다. 결국 5개 기존 일반은행들은 국회가 만든 은행법을 놔두고 조선총독부 시절의 은행령의 적용을 받았다. 그 은행령(제23조)에서는 조선총독부(정부)가 은행을 감독한다. 그러므로 은행법이 시행되지 않는 한, 재무부는 은행감독 업무를 유지할 수 있었다. 대신 일반은행들은 한은법과 은행령에 따라 한국은행과 재무부의 이중 감독을 받아야 했다.

재무부 직원들이 찾아낸 다른 방법은 한은법이 적용되지 않는 은행을 만드는 것이었다. 한국산업은행이 첫 시도였다. 조선식산은행은 1918년 10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자회사로 설립되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조선총독부의 지휘·감독을 받으며 조선은행의 라이벌로 활동했다. 이 은행을 한국산업은행으로 부활시켜 정부가 지휘·감독권을 갖는 것이 재무부 직원들의 목표였다. 한국은행(구 조선은행) 직원들에게 감독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던 식산은행 직원들의 바람이기도 했다.

산은 업무계획 검토권 줘 한은 달래기도

그러나 한은법 적용을 배제하는 기관을 만들겠다는 재무부 직원들의 의도는 좌절됐다. 부산 피난시절인 1951년 10월 발의된 한국산업은행법안(산은법)은 국회에서 심하게 비판받았다. 재정자금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는 장기금융 전문기관 설립은 전쟁 중에 시급하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는 이유였다. 식산은행 두취(행장)를 역임한 백두진 재무장관(조선은행 출신)마저 부하들이 준비한 법안에 시큰둥했다.

재무부 직원들은 장관이 바뀌기만 기다렸다. 백두진의 후임인 박희현은 조선총독부와 과도정부를 거친 정통 재무 관료인데, 그는 산은법 제정을 은행법 시행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산업은행은 지급준비 의무와 여수신금리만 금융통화위원회의 결정을 따를 뿐, 나머지는 재무부의 지휘를 받는다. 그러므로 산은법 제정은 한은법 체제에 구멍이 뚫리는 것을 의미한다.

김유택 한은 총재는 1953년 11월 은행감독권을 받는 대신 산은법 제정에 동의했다.

김유택 한은 총재는 1953년 11월 은행감독권을 받는 대신 산은법 제정에 동의했다.

하지만 정부가 갖고 있던 일반은행에 대한 감독기능을 한국은행이 양도받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김유택은 고민 끝에 산은법 제정에 동의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1953년 11월 제정된 산은법은, 특수은행을 앞세운 정부의 은행감독권 회복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일본식 금융시스템의 소리 없는 부활이기도 했다.

1954년 1월 출범한 산업은행은 홀로 설 수 없는 조직이었다. 증권시장이 없었던 당시 이 은행의 채권(산금채)을 인수할 수 있는 기관은 한국은행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부는 구용서 전 한은 총재를 산업은행의 초대 총재로 임명하고, 한은이 매년 산은의 업무계획을 검토하는 권한을 주었다. 구 총재는 정부가 원리금 상환을 보증한 산금채를 인수해 달라고 옛 부하들에게 점잖게 부탁했고, 한은은 전임 총재가 갖고 온 산은의 업무계획과 자금지원 요청을 검토하면서 우쭐했다(지금도 다급해지면, 정부가 한은에게 정부보증채 인수를 제안한다).

당시 한국은행은 자신만만했다. 1953년 12월 서울 도매물가는 전년동기대비 26.2% 상승에 그쳐 광복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열 달 전 단행했던 제1차 화폐개혁의 효과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화폐개혁과 물가안정을 자신의 중요한 치적으로 생각하고, 그 실무책임자인 김유택 총재를 각별히 신임했다. 김유택은 그 신임을 바탕으로 재무부가 반대하는 국제기구(IMF·IBRD) 가입까지 강하게 밀어부쳤다.

인플레를 조폐공사 탓으로 돌린 대통령

그러던 어느 날 대통령이 급하게 김유택을 찾았다. 소매물가가 다시 상승할 조짐이 보인다는 조간신문 기사를 읽고 자초지종을 물으려던 것이다. 그런데 김유택은 국제기구 가입협상을 위해 해외출장 중이었다. 마음이 조급해 진 대통령은 두 주먹을 입에 대고 입김을 불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5년 간 감옥생활을 한 대통령은, 화가 나거나 마음이 얹잖아지면 손이 저려왔다. 그래서 두 주먹에 후후 입김을 부는데, 그때는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했다. 대통령은 내무부 치안국장을 불렀다. 그리고 부산시 동래에 위치한 조폐공사의 화폐인쇄기에 봉인을 명령했다. 인플레이션의 주범을 조폐공사로 본 것이다.

1954년 2월 11일 오전 11시 모든 인쇄기에 봉인이 붙었다. 분명 웃기는 일이었지만, 현장의 조폐공사 직원들은 웃을 수 없었다. 이튿날 귀국한 김 총재는 여의도 공항으로 마중 나온 박숙희 수석부총재의 보고를 듣고 경무대로 달려갔다. 당시 인플레는 매우 경미한 수준이라고 일단 대통령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물가상승의 근본원인은 조폐공사가 아니라 전후 재정지출 확대에 있다고 설명했다. 김유택이 경무대를 다녀 간 다음날 인쇄기의 봉인이 풀렸다.

당시 재무장관이 발을 굴리며 김유택의 귀국을 기다려야 했던 것은, 한국은행의 위상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당시 재무장관은 1년에 한번 씩 바뀌는 자리였다. 박희현(1953년)·이중재(1954년)·김현철(1955년)·인태식(1956년)·김현철(1957년)의 순이었다. 그러니 통화정책은 전적으로 한국은행의 몫이었다. 재무부는 예산과 조세문제만 챙겼다.

재무장관이 금융통화위원회의 의장이었지만, 재무부는 통화정책에 관심이 없었다. 실속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도정부 때부터 미국이 각종 경제정책에 깊이 개입해 왔고, 1952년부터는 한미합동경제위원회(CEB)를 통해 거시경제정책을 조정했다(마이어협정). 그에 비해 은행감독은 세속적인 힘을 과시할 수 있었고, 재량권도 넓었다. 그래서 관료들이 악착같이 매달렸다. 한국에서는 장기산업금융 전문은행 설립이 요원하다는 보고서(블룸필드 보고서, 1950년 2월)를 묵살하고 산업은행 설립을 극구 서두른 것이 그 증거였다.

1955년 여름 임명된 김현철 재무장관은 한술 더 떴다. 당시 한국은행 구내 이발실은 금융계의 사랑방 구실을 했는데, 거기서 이발을 마친 장관이 예고 없이 총재실을 찾았다. 김 장관은 총재와 대화를 나누던 중 불쑥 “대통령에게는 이미 양해를 구했으니 한국은행 은행감독부를 재무부로 옮기는 것으로 알라”고 통보했다. 그것은 관치금융 복귀의 신호탄이었다. 김유택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눈썹 끝이 올라갔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차현진 한국은행 금융결제국장 hyeonjin.cha@bok.or.kr
서울대 사회과학대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올해로 33년째 한국은행에 근무 중이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 『숫자없는 경제학』, 『금융 오디세이』 등 금융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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