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도국 기업들, 선진국 대기업 먹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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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신흥 개발도상국(이머징 마켓) 기업들이 국제 인수합병(M&A)시장에서 유럽과 미국의 기업을 왕성하게 사들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3일(현지시간) 시장조사기관인 딜로직의 자료를 인용, 지난해 아시아.중동.라틴아메리카 기업들이 유럽 기업들을 인수하는 데 420억 달러를 쏟아부었다고 보도했다. 2004년보다 두 배 이상으로 증가한 수치다. 미국 기업 인수엔 지난해 140억 달러를 써 종전 최고기록(2000년 100억 달러)을 훌쩍 넘어섰다.

최근 영국에서는 오랜 역사의 항만 운영 업체 '페닌슐라 앤드 오리엔탈 스팀 내비게이션(P&O)'이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포츠월드'에 인수됐다. 2005년 초에는 IBM의 PC사업 부문을 중국 레노보 그룹이 12억5000만 달러에 사들였다. 인도 기업들도 해외 기업 쇼핑에 적극 나서고 있다. 자동차 부품 업체인 바라트 포지가 스웨덴 업체를, 소비자 가전 업체인 비디오콘은 프랑스 톰슨사의 브라운관TV사업부를 인수했다.

과거 선진국 기업의 먹잇감이었던 개도국 기업들이 거꾸로 해외 기업 인수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은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M&A를 활용, 글로벌 경쟁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석유 등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고 서구 투자자들이 증시에 몰려든 덕에 개도국 기업들은 '실탄'이 풍부해졌다. 특히 이들 기업은 산업 다변화를 추진하는 자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

씨티그룹의 유럽 M&A 책임자인 피터 태그는 "개도국 대기업은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특별한 경쟁자 없이 빠르게 성장했으며, 이제 세계 무대에 공격적인 기업 사냥꾼이 됐다"고 말했다.

한편 프랑스의 르 피가로 매거진 최신호는 인도.중국 등 신흥 개도국 기업가들을 '신 포식자들'로 지칭하며, 이들이 준비가 안 된 '늙은 유럽'을 탐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탈 스틸의 총수인 인도인 락슈미 미탈이 룩셈부르크 철강회사인 아르셀로를 인수하겠다고 나선 것도 이런 움직임의 하나라는 분석이다. 잡지는 대표적인 포식자로 ▶'디즈니랜드 파리'의 지분을 소유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알왈리드 벤 탈랄 ▶영국 첼시 구단주인 러시아 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 ▶멕시코 통신 재벌 카를로스 슬림 엘뤼 ▶프랑스 향수 업체 마리오노를 인수한 홍콩의 갑부 리자청 등을 꼽았다.

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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