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열며

'CEO학'의 태동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요즘은 흔히 듣는 외래어지만 10년 전만 해도 경영학 교과서에서나 접할 수 있는 낯선 용어였다. 그전에는 사장.대표.대표이사가 보통이었다. 대개 기업 이사회의 수장을 뜻하고 흔히 '최고경영자'로 번역되는 이 말이 국내 일반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다. 사장이라는 자연스러운 표현이 굳이 CEO 또는 최고경영자라는 다소 근엄한 말로 둔갑한 것은 당시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큰 홍역을 앓고 나자 뭔가 바뀌어야 한다는 국민의 자성과 기대가 새로운 용어의 유행을 부추겼다는 해석이다. (CEO 연구가 이해익)

'대마불사'를 믿고 차입 경영과 문어발 확장을 일삼다 몰락한 경영자들이 지탄을 받았다. 또 한편에선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이다 법정관리다 해서 망가진 회사를 오뚝이처럼 일으킨 전문경영인들이 조명 받기 시작했다. 2000년을 전후해 정보기술(IT) 붐이 불자 기술력과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무장한 젊은 벤처 경영자들이 CEO라는 용어에 힘을 보탰다. 벤처 캐피털의 뒷받침으로 엔지니어.의사.변호사.교수 같은 전문직들까지 대거 창업전선에 뛰어드는 바람에 CEO라는 용어에 신선함까지 불어넣었다. '사장님' 하면 배 좀 나오고 회전의자에 앉아 결재하는 40, 50대 중년을 떠올렸다. 새로 유행한 CEO라는 말에는 학식과 부.명예까지 갖춘 30대 경영자라는 이미지까지 들어섰다.

윤종용.안철수 같은 스타 CEO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뉴스의 표적이 된 지 오래다. 대한상공회의소.전국경제인연합회 같은 CEO 이익집단의 성명서나 설문조사 내용은 언론에 대서특필되기 일쑤다. CEO를 격려하는 상이 하도 많아 잘나가는 대기업의 CEO는 자신의 수상식장에 일일이 얼굴을 내밀기 힘들어 임원을 대신 보낼 정도다. 성공한 CEO의 강연회는 청중으로 꽉 찬다. 요즘 유행을 탄 청소년 경제강좌에서도 최고 인기강사는 CEO들이다. 개방형 직제가 확산하는 공기업마다 노련한 민간기업 CEO 출신들이 물밀듯 몰려들고 있다. 엘리트 관료도 자리를 박차고 사업가의 길로 뛰어드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들은 비즈니스 분야에만 머물지 않는다. 삼성전자 CEO 출신인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은 현 정부 최장수 각료로 활약하고 있다. 야당의 한 대권 후보는 "CEO 출신 대통령이 나올 때"라는 주장을 편다. 공연예술계도 예술성 못지않게 경영마인드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유명 지휘자 금난새씨는 최근 한국CEO연구포럼이라는 연구단체에서 '문화 CEO'상을 받았다. 유라시안필하모닉을 '벤처 오케스트라'로 키운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달 초 한 취업 포털이 대학생 460여 명을 대상으로 가장 존경할 만한 집단을 조사해 봤더니 CEO라는 응답(22%)이 교육자(17%).시민단체(10%)를 누르고 으뜸이었다. 'CEO 주가'라는 말이 있다. 최고경영자의 실력과 철학, 리더십과 결단력이 기업의 성쇠를 좌우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기업전쟁 시대에 잘난 CEO가 많다는 것은 커다란 국가적 자산이다. 최근 경영학계와 경영컨설팅 업계의 덕망있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CEO학'이 태동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21세기 지식정보사회에 걸맞은 CEO상이 뭔지 탐구하려는 것이다. 1970년대 경제학이 개발연대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고 80, 90년대 고도성장기엔 경영학이 업계에 선진경영 노하우와 인재를 제때 제공했듯이 CEO학이 우리 기업체질을 한 단계 높이는 견인차 노릇을 하길 기대해 본다.

홍승일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