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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에 오른 ‘크런치 모드’, 노동 착취인가 개발 업무의 숙명인가…게임 업계 논란 가열돼

중앙일보

입력

노동 착취일까, 개발 업무의 특성일까.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게임 업계의 ‘크런치 모드’가 다시 한번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크런치 모드는 게임 출시 전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실시하는 집중 근무 형태를 가리키는 업계 용어다. 잦은 야근과 혹독한 업무 강도, 일상적인 수당 미지급 행태 등 게임 업계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대변하는 단어로 부상하고 있다.
 크런치 모드는 21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국내 게임사 집중 기획 감독 조사 결과’에서도 부각됐다. 이날 발표에 따르면 조사를 받은 12곳 게임 업체의 3250명 직원 중 2057명이 연장근무 시간 한도(주 12시간)를 초과해 근무했다. 이들에겐 연장근무 수당이나 퇴직금 등 약 44억원이 지급되지 않았다. 노동부는 위반 사항 시정을 지시하며 “시정하지 않을 경우 노동관계법 위반 혐의로 처벌할 예정”이라고 강도 높은 처방을 내놨다.
 게임 업계에서는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업계의 열악한 노동 환경은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주목을 받았다. 특히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지난달 대선 출정식을 열며 “야간 노동이 얼마나 심했으면 디지털 단지에 오징어 배가 뜬다(한밤중 동해 앞바다에 오징어잡이 배 불빛이 보이듯 디지털 단지에 한밤중까지 불이 훤히 켜있다는 뜻)는 자조를 했겠느냐”며 문제 해결을 약속하기도 했다. 이 주제는 대선 TV 토론회에서도 열악한 청년들의 고용 실태를 대변하는 사례로 자주 언급되기도 했다.
 실제로 올해 넷마블에서만 돌연사 등으로 사망한 직원이 3명인 것으로 밝혀지며 이런 혹독한 노동 강도는 더 큰 논란으로 번졌다. 넷마블 측은 “이들 사망이 회사 업무와 직접적인 상관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면서도 지난 2월부터 ^정시 퇴근 독려 ^퇴근 뒤 메신저 금지 ^심야 업데이트 금지 등 근무 문화 개선안을 시행하고 있다.
 게임 업계의 노동 환경이 유독 열악한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게임 산업 성장의 역사와 제품 특성에서 원인을 찾는다. 1990년대 한국 게임 산업을 태동시킨 1세대 개발자들이 부족한 자본과 인력으로 개발을 진행하다 보니 잦은 야근과 촉박한 개발 일정이 일상화됐단 얘기다. 이런 분위기가 20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으면서 개발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조직 문화가 형성됐다.
여기에 한국식 ‘빨리빨리’ 문화가 결합해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개발 기간을 짧게 잡는 관행이 자리잡았다. 이승훈 영산대 게임영화학부 교수는 “미국·유럽의 회사와 달리 한국 게임 업체들은 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돌발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고 개발 일정을 짜는 게 보통”이라며 “개발을 지연시키는 돌발 상황은 늘 발생하기 마련이어서 개발 후반부 작업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몰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런 관행으로 한국이 빠른 속도로 게임 신제품을 내놓고 해외 시장의 인정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산업이 성숙기에 도달한만큼 노동 환경 개선에 신경을 쓸 때가 됐다”고 덧붙였다.
스토리 창작이나 디자인 등 유난히 예술적 요소가 많이 가미되는 것도 근무 환경에 영향을 미쳤을 거란 주장도 나온다. 이재홍 숭실대 문예창작과 교수(한국게임학회장)는 “게임은 종합 문화예술로 불릴 만큼 예술적 창작 요소가 많은 제품”이라며 “개발 과정에서 몰입이 굉장히 중요하고, 이 때문에 고정된 근무 시간에만 일을 하라고 강제하는 것도 다소 무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넉넉한 개발 기간과 충분한 인력 확보 등 게임업계의 전반적인 여건이 개선돼야 노동 환경이 나아질 거라고 조언한다. 윤준희 한국게임개발자협회장은 “최근 야근에 지친 개발자들이 회사를 나와 ‘인간다운 노동 환경’을 지향하는 게임 회사들을 창업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며 “이들 회사가 개발 일정과 인력을 넉넉히 유지하면서도 좋은 성과를 낸다면 지속가능한 성장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에선 노동 환경을 개선하되, 게임 산업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승훈 교수는 “지나친 야근이나 촉박한 일정은 당연히 개선돼야 하겠지만, 근무 시간을 획일적으로 정하는 식의 감독은 게임 산업에 맞지 않는다”며 “게임 개발자의 문화를 이해하고 유연하게 정책을 집행하는 게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안별 기자 ahn.bye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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