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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도보도 못한 희귀병 앓는 70만명…인식 부족에 또 한 번 운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김진구 기자]

“증상이 처음 나타난 건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피부 염증과 구내염이 심하게 나타났습니다. 학업 스트레스로 여겼습니다. 푹 쉬면 나아질 거란 기대완 달리 염증은 궤양으로 악화됐습니다. 통증은 눈으로도 퍼졌습니다. 안과를 찾았지만 특별한 원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방치하는 사이 증상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대변에 피가 섞여 나오고, 안 아픈 관절이 없을 정도로 온 몸이 아팠습니다. 그제야 찾은 대학병원에선 ‘베체트병’이라고 했습니다.”


서울 동대문구에 사는 김우철(31세·가명)씨는 자신이 앓는 희귀질환을 빨리 알아채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깝다. 다행히 병을 진단받은 뒤 생물학적 제제을 주사 받으며 치료를 받고 있지만, 오랜 기간 방치된 탓에 떨어진 시력은 더 이상 회복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군인이 꿈이었던 그는 약해진 몸 때문에 그 꿈을 접어야 했다. 대학시절 친구들과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다녀오지 못한 게 안타깝다는 그는 지금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러나 학업과 투병 생활을 동시에 해야 해 만만찮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씨는 “증상이 처음 나타났을 때 더 적극적으로 전문의를 찾고 올바른 진단을 받았더라면 지금처럼 증상이 나빠지진 않았을 것”이라며 “희귀질환을 조금 더 빨리 진단받을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안타까워했다.


김씨처럼 희귀질환을 앓는 환자는 전체 인구의 5~6%, 세계적으로는 3억5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국내에선 2014년 기준 69만4695명이 희귀질환을 진단받은 것으로 나타났다(건강보험심사평가원). 2010년 47만9258명에 비해 45% 늘었다. 정부가 보험적용 대상 질환을 확대한 데 따른 것으로, 실제로는 더 많은 환자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같은 희귀질환이라도 환자가 2만 명 정도에 달하는 질환이 있는 반면, 국내 유병인구가 10명 내외인 희귀질환도 있다. 희귀질환관리법에 따르면 희귀질환은 유병인구가 2만 명 이하거나, 진단이 어려워 유병인구가 파악조차 되지 않는 질환을 의미한다. 이런 희귀질환의 종류는 전세계적으로는 7000종, 국내에는 1066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희귀질환에서 가장 큰 문제는 질환에 대한 정보 부족이다. 환자는 물론 의사조차 정확한 진단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파킨슨병이나 루게릭병, 다발성 경화증 같이 비교적 대중적 인식이 높은 질환은 그나마 ‘진단’이 가능하다. 치료·관리는 별개의 문제다. 희귀질환 가운데 치료제가 있는 경우는 5% 미만이다.

치료제 있는 희귀질환 37% 불과…약 있어도 못 쓰는 이유는

“저는 화농성 한선염이라는 희귀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엉덩이·사타구니·겨드랑이에 종기가 생겨나고 몸 이곳저곳에 움푹 파인 듯한 흉터가 생겼습니다. 고름 부위엔 마취가 제대로 되지 않아 고름을 짜낼 때마다 심각한 통증을 겪어야 합니다. 신체적 통증은 그나마 낫습니다. 종기 때문에 성병이나 전염병 환자로 오해 받을 때는 정말 속상합니다. 가장 안타까운 건 병원비입니다. 약값의 60%를 환자가 부담해야 하는데, 9개월(36주)간 1000만원에 달합니다.”


부산 남구에 사는 이동재(30세·가명)씨가 앓는 화농성 한선염은 생물학적 제제를 사용해 평생 증상을 관리할 수 있는 질환이다. 그러나 이씨는 마음 놓고 약을 쓸 형편이 안 된다. 화농성 한선염이란 질환이 희귀질환으로 등록되지 않아 산정특례를 적용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인부담상한제가 있어 일부 돌려받을 수 있다곤 하지만, 형편이 어려운 이씨로선 어마어마한 치료비를 내고 이듬해까지 기다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씨는 “병 때문에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해 비정규직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며 “그 자체로도 미래가 막막한데 치료비 부담까지 더해져 하루에도 수십 번씩 치료를 중단할지로 고민한다”고 말했다. 그는 “피부병이라고 해서 다른 희귀질환보다 아프지 않은 게 아니다”고 토로했다.


국내 1000종의 희귀질환 가운데 치료제가 있는 희귀질환은 37% 가량인 400여종에 불과하다. 그러나 5%의 희귀질환을 앓는 환자 모두가 치료제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희귀질환관리법에 따라 의료비 지원 사업, 산정특례(희귀난치성질환자로 확진받은 자가 등록절차에 따라 공단에 신청한 경우 본인부담률을 10%로 경감하는 제도) 등을 통해 의료비 보조를 시행하고 있다. 2000년도부터 단계적으로 산정특례를 확대, 현재 164종의 희귀질환에 76만 명이 혜택을 받아 치료비용의 10%만 부담하는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는 환자가 적지 않다. 이씨처럼 산정특례 적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 또, 희귀질환 자체에 대한 치료는 지원되지만, 이로 인한 합병증은 보험에 적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해외에서 효과가 입증된 신약이 나왔음에도 국내 허가에 시간이 걸려 사용할 수 없는 경우도 있어 환자들의 속을 태운다.

가장 큰 설움은 사회적 편견…희귀질환 극복의 날 지정

“어느 날부터 대변에 피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선 대장암이 아닌 궤양성대장염이라고 했습니다. 그땐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차라리 대장암이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수술로도,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이 난치성 질환 때문에 직장생활·가정생활에서 겪는 불편함은 말로 다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렵게 입사한 직장에선 질환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하고 이해를 구했음에도 잦은 화장실 출입과 병원 방문으로 ‘아프면서 취직은 왜 했냐’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2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착한걸음 6분 걷기 캠페인'에 참가한 시민들이 맨발로 돌길을 걷고 있다. 이번 캠페인은 제1회 희귀질환 극복의 날을 맞아 희귀질환 조기진단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마련됐다.

경기도 성남시에 사는 최영재(37·가명)씨는 증상이 심해져 달았던 인공항문(장루)을 떼어낼 때까지만 해도 이런 소외감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이해를 구하지만 그 순간이 전부였다. 속상한 마음에 일을 관두려고 해도 비싼 병원비 때문에 악착같이 버텼다. 그러나 결국엔 권고사직이란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다른 직장에 들어갔지만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희귀질환자들이 고통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사회적 편견이다. 대다수 희귀질환자는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한다. 어렵게 구직해도 업무를 이어나가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계 희귀질환의 날’(2월29일)에 더해 ‘희귀질환 극복의 날’(5월23일)을 정부 차원에서 지정한 이유다. 정부는 지난해 말 시행된 희귀질환 관리법에 따라 희귀질환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높이고, 예방·치료 및 관리 의욕을 고취시키고자 희귀질환 극복의 날을 지정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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