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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카레이스키 강제이주 80주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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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열

유주열

‘디아스포라’라는 그리스어가 있다. 민족 집단이 고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흩어져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민족이산의 의미이다. 우리민족이 과거 소련의 연해주에 많이 건너가 뿌리를 내렸다.

발해의 옛 땅 연해주

연해주는 우리 선조가 세운 발해의 옛 땅으로 간도와 함께 우리 민족의 생활터전이었다. 일제 강점 시대에는 일본이 접근하지 못하는 보호지역(sanctuary)이 되어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우수리 강을 건너 만주 지역의 일본 경찰서를 습격하고 연해주로 몸을 피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1879-1910)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저격에 성공한 것도 연해주를 근거로 한 최재형 등 독립투사들이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연해주에 항일 독립 운동가들이 늘어나자 1937년 10월 구소련의 스탈린은 일본 스파이 침투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의 한인 20만 명을 강제로 시베리아 열차에 태워 6500km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 금년이 강제이주 80주년이 되는 해다. 지금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한민족 디아스포라 카레이스키(高麗人)는 대부분 연해주 출신이다.

 김일성과 연해주

그 후 스탈린은 일본의 괴뢰정부 만주국에 위협을 느끼고 항일 빨치산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40년 초 소련 극동군은 하바롭스크 북쪽의 ‘비야츠코예’와 블라디보스토크 북쪽의 ‘라즈도리노예’라는 작은 마을에 남북으로 야영소를 만들어 일본 관동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온 중국과 조선의 항일부대를 수용 게릴라 훈련을 시켰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일성(1912-1994) 항일 빨치산 부대도 관동군에 쫓겨 소련으로 도주 비야츠코예 야영소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가 일본의 항복으로 소련에 의해 북한으로 돌아 가 조선 노동당 위원장이 되었다.

연해주(沿海州)는 문자 그대로 바다에 연해 있는 지역이다. 러시아에서도 ‘바다(海)’라는 의미로 ‘프리모르스키’라고 부르고 있다.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여 처음으로 만나는 바다가 태평양으로 연결되는 동해이고 연해주는 동해 연안의 지역을 말한다.

모피 사냥을 통한 러시아 극동진출  

유럽의 강국 러시아가 극동의 연해주를 차지한 것은 유럽 귀족사회에서 인기 있던 모피를 얻기 위해서였다. 난방장치가 제대로 안된 유럽 사회에서는 모피 외투로 겨울을 견딜 수 있어 모피는 고가의 상품이었다. 모피 사냥꾼은 용맹한 코사크 족의 보호를 받으면서 아무르(黑龍) 강을 따라 남하 처음으로 중국의 청조를 만난다. 만주족 청조는 산하이관(山海關)을 넘어 베이징을 점령하였지만 명(明)의 잔존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그 진압에 여념이 없었다.

조선과 러시아의 전쟁
청조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조선의 지원이 필요했다. 우리 역사에 기록된 ‘나선정벌’이다. 당시 조선의 국왕은 병자호란 때 삼전도에서 항복의 치욕을 당한 인조의 둘째 아들 효종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청조에 사신으로 다녀 온 신하가 조총을 잘 쏘는 군인 100명을 뽑아 나선 남하를 막는데 지원하라는 청조의 요구가 있었다고 복명한다.

오랜 기간 형님 소현세자 부부와 함께 심양에서 인질생활을 하여 청국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한 효종도 ‘나선(羅禪)’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1654년 조선의 장군 변급이 인솔한 100명의 무사들은 아무르 강에서 코사크 군대와 조우한다. 코사크 군대는 아무르 강에서 전함을 띄워 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변급은 코사크 군대를 육지로 유인하여 사령관을 전사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린다. 역사상 처음으로 러시아군과 조선군의 전투에서 조선의 승리였다. 조선은 청조의 요청으로 한 차례 더 신유 장군을 파병 러시아의 남하를 막았다.

러시아와 중국과의 국경

청조는 조선의 지원으로 간헐적으로 남하하는 러시아군을 막아내면서 시간을 끌어 오다가 반란군을 평정한 강희제(康熙帝)는 코사크 군의 본거지를 공격하여 남하를 좌절시켰다. 청조의 반격에 부딪친 러시아는 1689년 네르친스크에서 국경을 정하는 조약을 맺게 된다.

천하의 땅이 천제(天帝 중국의 황제)의 땅으로 생각하는 ‘천하개념’으로 국경이 없었던 중국이 러시아와 국경조약을 처음으로 맺게 된 것이다. 네르친스크 조약에서는 아무르 강 이북을 러시아 령으로 인정하고 아무르 강 이남과 우수리 강 동쪽 즉 연해주는 중국의 영토로 남았다.

사실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부동항을 노린 러시아가 정작 필요한 곳이 연해주였지만 강력한 청조의 기세에 억눌려 어쩔 수 없었다. 청조는 강희-옹정- 건륭제로 이어지는 최성기를 끝내고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쇠퇴해 가는 청조를 시험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청조와 아편전쟁을 통해 홍콩을 할양받는다. 러시아는 허약해진 청조를 위협 1858년 아이훈 조약을 체결했다. 연해주를 공동관리하자는 내용이다. 러시아는 ‘공동관리’라는 중간 단계를 두어 다시 기회를 기다렸다.

연해주 할양과 러시아의 동방정복

청조가 영불연합군이 일으킨 2차 아편전쟁에서도 패하자 러시아는 재빨리 강화를 주선하고 그 대가로 청조로부터 연해주 할양을 받아낸다. 아무르 강 이남과 우수리 강 이동의 연해주가 드디어 러시아 땅이 된 것이다. 두 강이 만나는 아름다운 하바롭스크가 이 때 러시아 영토에 편입된다. 러시아 탐험가 하바로프의 이름을 딴 하바롭스크는 고대 한민족의 일부였던 예맥(濊貊) 두 부족이 살던 곳으로 지금도 하바롭스크 시의 문장(市旗)에는 두 부족을 상징하는 호랑이(虎) 토템과 곰(熊) 토템이 마주보고 있는 그림이 들어 있다.

1860년에 체결된 베이징 조약에서 중국은 연해주를 완전히 잃어 동쪽 바다(東海)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막혀버렸다.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나가기 위해 연해주 최남단에 제국의 위용을 갖추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한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보스토크)을 정복(블라디)’는 말 그대로 러시아인의 꿈이 서려있는 항구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12년 9월 APEC 정상회의 개최 등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연해주 발전을 위해 한국에 손짓하고 있다. 한반도 통일을 생각한다면 한민족 디아스포라 발상지 연해주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본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한중투자교역협회자문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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