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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평판이 뭐가 중요하냐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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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호 19면

 런던 아이(London Eye)

얼마 전 유나이티드항공 기내에서 시카고 공항 경찰이 승객을 강제로 끌어내 공분을 샀다. 이 사건은 기업 평판이란 쟁점을 다시금 환기시켰다. 삼성전자의 갤럭시 노트 리콜 사태와 폭스바겐의 디젤 스캔들도 비슷한 케이스다. 이런 사건들은 기업의 맷집을 확실히 테스트한다. 상황을 제어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건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기업에 부정적 영향이 빠르게, 널리 확산된다. 유나이티드 항공 사건에서 최고경영자(CEO)가 위기를 알아채기도 전에 수백만 명의 시청자들은 승객을 강제로 추방하는 영상을 봤다. 이런 일은 앞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과연 이런 사건들이 기업에 지속적인 악영향을 미칠까?

재앙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평균적으로 기업 가치 15% 하락 #직원 흔들리고 기업 무너질 수도 #위기 대응방안 미리 준비하고 #사고 나면 CEO가 직접 수습해야

일각에서는 기업의 평판이 더 이상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유나이티드 항공의 지주회사인 유나이티드 콘티넨탈의 주가에는 사건 이후 심각한 영향이 없었다. 삼성전자도 중장기적인 후유증은 겪지 않았고 폭스바겐의 이익은 오히려 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평판의 위기란 도로 위에 불룩 솟은 둔덕과 같다고 할까. 장기적인 피해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정상적 기업 활동의 일부인 셈이다. 무엇보다 시장에서 견고한 우위를 지켜나가는 기업이라면 고객들은 좋든 싫든 줄지어 기다려 가며 제품을 사줄 것이다. 고객의 충성에 기댈 수 있는 기업에겐 세상은 너그럽고 좋은 곳이다. 고로 기업이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 해명에 나서는 건 불필요해 보일 수도 있다.

악재 잘 극복하면 주가 10% 올라

그러나 실제로는 이와 반대인 사례가 더 많다. 평판을 잃었을 뿐인데 재앙에 가까운 재정파탄으로 이어진다. 미국의 유니언카바이드는 1984년 인도 보팔시에서 발생한 유독가스 유출 참사로 결국 파산했다. 영국의 석유화학회사 BP는 멕시코만 원유 유출사건으로 시가 총액의 절반이 날아갔다. 800억 달러에 달하는 이 손실로 CEO가 해임됐다. 소실된 기업가치가 기름유출로 치른 비용보다 훨씬 컸다. 서비스 분야에서 평판은 특히나 중요하다. 미국 에너지·물류기업 엔론의 분식회계를 눈감아 줬던 회계법인 아서앤더슨은 사업을 접게 됐다.

옥스퍼드 메트리카는 지난 30년 동안 벌어진 수백 건의 사건들이 주가에 미친 영향을 연구했다. 사건 발생 당일 주가를 기준으로 주가 변동을 추적한 결과 20일 동안 약 5% 하락했다. 강제퇴거 사건 이후 유나이티드 콘티넨탈의 주가 하락폭과 거의 맞아 떨어진다. 일견 큰 악영향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승자와 패자로 나눠진다. 패자는 초기 주가 하락폭이 12%에 달하고 이듬해에는 하락폭이 15%까지 늘어난다. 영구적인 손실이 되는 셈이다. 승자의 주가는 초기 손실을 극복하고 이후 평균 10% 상승한다.

추가 분석 결과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다른 요소가 있었다. 서비스 회사들은 더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 무엇보다 사망자가 발생하면 항구적인 손상이 초래되기 쉽다. 제아무리 매끄러운 해명이라도 고객을 죽거나 다치게 한 사실을 덮을 수 없다. 하지만 제대로 대응한다면 재난 상황이 기업 평판과 주식 가치를 끌어올리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2000년 콩코드기 추락 사건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비극이었지만 에어프랑스의 사고수습 절차는 효과적으로 이뤄졌다. 재빠르게 책임지는 자세를 보인 것, 명확한 커뮤니케이션, 피해자 가족에 대한 예우와 아낌없는 지원이 핵심이었다. 덕분에 사고 이후 평판은 더 올라갔다. 239명의 탑승객을 태운 여객기가 돌연 해상에서 사라졌을 때 말레이시아 항공이 탑승자 가족들을 대한 방식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법적 대응은 최악의 선택이 될 수도

재난에 대한 사전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패자 기업들과는 반대로 승자 기업들의 대부분은 대응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회사 법무팀은 책임을 인정하는 발언을 피하고 입을 다물라고 조언하는 경향이 있다. 책임 회피를 위한 이같은 지연행위는 신뢰를 곧바로 손상시킨다. 고객이 항상 옳다는 오랜 격언은 꽤 좋은 행동지침이다. 피해자나 그 가족들과 신속히 보상 방안을 협의하는 데 실패한다면 지난한 법정 다툼만이 남는다. 변호사들이 아무리 합법적이라고 강조해도 평판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나이티드 항공은 평판 훼손을 피할 수 있었다. 신속하게 책임을 인정하고 적절한 보상을 제공했다면 말이다. 추가적으로 오버부킹과 경찰력을 동원하는 규칙을 수정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항공사는 더 잃어버릴 평판도 없다고 결론 내린 것 같다.

그런데 주가만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주가는 쓸모가 많은 금융 지표라는 점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기업 가치를 측정하는 척도며, 효율적인 시장에서라면 장기적으로 예상되는 재정적 결과들을 반영한다. 주주는 기업의 잔여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갖고 있다. 기업이 도산하면 직원과 은행들이 회사 재산을 챙겨 가고도 재산이 남아야 주주들의 차례가 온다는 의미다. 사업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은 종국에는 주주들에게 전가된다. 하지만 평판 훼손은 직접적인 주가 하락뿐 아니라 CEO 해고나 브랜드 포기, 최악의 경우 해당사업 매각 등의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고로 주가는 단기적인 척도일 뿐이다. 재앙에 대응하지 못해 평판이 훼손되면 능력 있는 신입사원이나 경영진을 고용하기 어려워지고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운명까지 위태로워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업 평판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세상을 떠올려 보자. 얼마나 유감스런 사태들이 일어날까. 기업들은 결과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냥 나쁜 행동을 해버릴 수 있다. 소에게 여물을 주듯이 고객들에게 똑같은 제품과 서비스를 강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실수를 범해선 절대 안 된다. 수십 년간 쌓아도 삽시간에 무너지는 게 평판이다. 평판은 기업의 최고위층에서 조심스럽게 다뤄야하는 엄청난 자산이다.

로리 나이트
스위스 중앙은행 부총재와 옥스퍼드대 경영대학인 템플턴칼리지 학장을 역임했다. 현재 영국의 대표적 투자자문사인 옥스퍼드메트리카를 이끌고 있으며, 템플턴 재단 이사로 투자위원회 의장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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