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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유쾌한 '오지라퍼' 이성민의 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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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민(48)은 사진 찍기를 유독 쑥스러워한다고 들었는데, 이번엔 아주 자연스럽다. “이거 정말 많이 나아진 거예요”라고 웃으며 자평도 한다. 그런 모습에 대호의 얼굴이 포개졌다. 이성민표 코미디는 어떤 그림일까 자못 궁금했다. 돌이켜 보면 그는 악랄한 정치인부터 평범한 서민, 정의로운 의사까지 다양한 역할을 맡았지만 코미디 연기를 선보인 적은 많지 않았으니까. 대호는 이성민 본래의 인간적 이미지에 ‘오버 액션’과 웃음을 더한 캐릭터다. 이날 만난 이성민은 대호만큼이나 친근하고 밝았으며, 솔직했다.
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

사진=전소윤(STUDIO 706)

사진=전소윤(STUDIO 706)

‘보안관’의 서민적인 정서가 마음에 들어 출연을 결정했다고.  

“이 영화는 대호라는 평범한 영웅을 그린 이야기라 같았다. 시쳇말로 ‘후까시’가 없는 히어로영화랄까. 그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늘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니까. 김형주 감독은 고향 부산에서 어느 동네에나 있을 법한 반장 아저씨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더라. 그런 서민적인 느낌이 참 좋다. 나 역시 시골 출신이기도 하고.”

경북 봉화가 고향이니 그런 지방 소도시의 느낌을 잘 알 것 같은데.

“맞다. 4H클럽(1940~70년대 활동한 농촌 생활 향상을 위한 마을 운동 조직) 같은 청년회 보고 자랐다. ‘보안관’은 부산 기장이 배경인데, 대호는 자기 동네의 대소사를 챙기고 마을 사람들의 어려움을 도와주려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극강 오지라퍼’다(웃음).”

대호가 사고를 많이 치긴 하지만 사실 매우 착하고 정 많은 사람이다.

“오지랖이라는 게 원래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부리는 거다. 우리 아버지도 그런 분이셨다. 남의 일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면서 집안 건사는 안 하시는 분. 그래서 어릴 땐 별로 안 좋아했었다(웃음). 그런 모습은 예전 우리나라 지방 특유의 푸근한 정서 같다. 서울 같은 큰 도시에선 잘 그러지 않잖나.”

조진웅을 비롯해, 김성균·김종수·조우진·임현성·배정남 등 남자 배우들이 많았는데,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

“영화 촬영하면서 이렇게 동료들과 정을 나눈 적은 없었다. 최고였다. 멀리서 보면 맨날 모여서 수다 떠는 아저씨들이었을 텐데. 조진웅, 김성균은 전부터 잘 알았고, 김종수 형님도 동생들과 눈높이를 같이하는 분이라(웃음) 정말 편했다. 모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다들 자기 분량 촬영이 끝나도 집에 먼저 안가고, 옆에서 맥주 먹다 함께 퇴근했다. 촬영 없는 날에도 현장에 나오고. 진웅이 방 아니면 내 방에 모여서 술도 자주 마셨다. 냉장고마다 맥주가 가득했지. 경쾌하고 밝은 영화 분위기에 맞춰 가다 보니 더 친해졌다. ‘보안관’ 흥행이 잘 돼서 다시 어울려 비슷한 작품을 또 찍고 싶은 동료들이다.”

김성균과의 호흡이 웃음의 관건일 것 같던데.

“제일 웃긴 장면도 대호와 덕만이 투덕거리는 와중에 나온다. 김성균은 한국 배우 중 늘어진 러닝셔츠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일 테다. 촬영하는 동안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비저 나왔다. 실제 성격은 세상에 저렇게 착한 사람이 있을까 할 만큼 착하고 가정적이다. 춘모 역을 맡은 배정남도 웃겼다. 톱모델 출신이라 사실 난 잘 몰랐거든. 처음 만났는데 잘 생겨서 ‘오~’ 했는데, 입을 열자마자 ‘아~ 이 영화에 캐스팅될 만한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했다(웃음).”

감칠맛 나는 사투리 대사가 웃음 포인트일 것 같다. 경북 사투리와 경남 사투리는 미묘하게 다르지 않나.  

“맞다. 특히 ‘마~!’ 같이 부산 사람들만이 쓰는 짧은 말을 신경 썼다. 김형주 감독은 내 대사를 잘 듣고 있다가 정확하게 지적해줬다. ‘선배님, 그건 부산말이 아닌데요’ 하면서. 나와 조우진 빼고는 모두 경남 출신이라 자연스럽게 그들 말투를 닮아가게 되더라.”

사진=전소윤(STUDIO 706)

사진=전소윤(STUDIO 706)

과거 유도 선수에 건강한 에너지를 가진 대호를 연기하느라 운동을 많이 했다고.

“운동도 제법 많이 하고 태닝도 했다. 파주 액션 스쿨에서 시키는 트레이닝 코스를 그대로 따랐다. 워낙 운동을 안 좋아하는 편인데, 팔 굽혀펴기도 하고 웃통 벗고 달리기도 했다. 태닝한다고 집 베란다에 돗자리 깔아놓고 속옷만 입고 누워있기도 하고(웃음). 나중엔 몸 좋은 사람들이 왜 옷을 벗고 다니는지 알겠더라. 몸이 탄탄해지니까 거울 보는 쾌감도 들고. 하하하.”  

영화 얘기를 해보자. 코미디 요소를 거둬내면 ‘의심’이라는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대호의 의심은 과연 옳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이 영화의 중요한 동력이다.

“출연을 결정한 또 다른 중요한 이유였다. 극중 마을 사람들은 대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여론이 한 쪽으로 쏠리는 상황인거다. 관객이 대호가 외면당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혹시 우리가 누군가의 의견을 묵인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어쩌면 현재 사회적 화두가 된 국정농단 사건도, 이전부터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있지 않았겠나.”

지금까지 평범한 아버지부터 검사, 의사, 정치인까지 다양한 역할을, 비중과 상관없이 폭넓게 연기해왔다. 작품 선택의 기준이 있다면.

“일단 시나리오가 가장 중요하다. 또 옷을 고를 때처럼, 내게 어울릴 만한 역할인지를 생각한다. 내 한계를 아니까. 내가 할 수도 있지만, 다른 배우가 더 잘 할 수 있는 역할도 종종 본다. 그럴 땐 다른 배우를 추천한다. 또 동료인 감독, 배우, 제작자를 보고 결정할 때도 있다. 사람은 늘 중요하니까.”

작품을 열심히 꾸준히 하는 배우로 꼽힌다. 쉬기는 하나.

“에이, 진짜 곰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은 (조진웅 쪽을 가르키며) 저기 있지. 지금은 윤종빈 감독의 차기작 ‘공작’을 촬영 중인데, ‘보안관’ 촬영 끝나고 ‘공작’을 기다리는 동안 몇 달 쉬었다. 가족들과 태국 여행도 가고. 이번에도 안 가면 혼날 것 같아서 다녀왔다(웃음). 사실 이렇게 길게 쉰 적이 없었다. 연극하던 시절에도 쉴 줄 몰랐다. 그게 힘들지가 않았다. 쉬면서 딱히 하고 싶은 것도 크게 없고.”

취미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한강에서 자전거 타고 집에 와서 아무 것도 안하기 정도? 쉴 때 잘 안 나간다. 아내가 슬슬 화가 나서 ‘안 나가?’라고 물을 정도로. 술을 즐기지 않으니까 불러주는 사람도 잘 없고(웃음).”

의외로 여성 팬들이 많다. 특히 어머니들이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인기 비결이 뭘까.  

“정말 몰랐는데, 요즘 같이 출연하는 젊은 배우들이 ‘우리 어머니가 좋아한다’고 얘기해주더라. 아침 드라마에 출연해 볼까(웃음). 이유는 나도 모르지. 쑥스럽게 그걸 어떻게 말하나.”  

무명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기회가 오는 순간을 위해 칼을 잘 갈아놔야 한다”고 한 적이 있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다잡는 말이 있었나.

“사실 나를 채찍질하는 큰 목표는 예전에도 지금도 없다. 그랬으면 더 빨리 지쳤을 거다. 연기는 내가 해야 할 일이니, 하루하루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열심히 했다. 생활이 궁핍하다고 무언가를 더 이루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게 힘든 시간을 잘 지나게 한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20대 후반에 아예 연기를 그만 둘까 고민을 하긴 했다. 그런데 할 줄 아는 게 연기 밖에 없더라(웃음).”

오랫동안 배우로 살며 지켜온 원칙이 있나.

“나 스스로를 얽매는 원칙은 딱히 없는데, 원칙 자체에 대한 생각은 확고하다. 한번 정해지면 모두 그걸 지키길 바란다. 이를테면 한 조직에서 밥을 먹고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사람이 설거지를 한다고 하자. 그러면 사장이 걸리든 막내가 걸리든 약속한 대로 벌칙을 받아야 한다. 사소한 약속이라도 쉽게 어기는 걸 보면 화가 난다. 원칙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태도가 한 개인과 조직을, 크게는 사회를 망가뜨리는 중요한 원인이 아닐까.”

연기할 때도 그런가.

“연기를 잘 하고 말고는 나의 의지를 벗어난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체중 감량이나 인터뷰 같은 영화 홍보 등등 이 역할을 맡아서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은 책임감을 갖고 하려 한다. 약속이니까.” 

배우로서 꿈꾸는 이상적인 삶의 방향이 있다면.

“나이가 들어가니 그런 고민을 많이 한다. 일단 이 일을 오래했으면 좋겠다. 그 다음엔 후회 없이 연기를 놓을 수 있게 마음 수련도 해야 할 것 같다(웃음). 개인적인 소망은 연극배우를 위한 소극장을 만드는 것이다. 배우 폴 뉴먼(1925~2008)이 말년에 무명, 신인 배우들을 위한 극장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그처럼 후배들이 마음껏 연기하며 놀 수 있는 터전을 만들고 싶다. 나이 들어 그런 후배들과 어울리며 함께 작업하면 더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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