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반도체·철강 … 수출 주력업종 화려한 귀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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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대형 비행기는 왼쪽과 오른쪽의 엔진이 함께 가동돼야 이륙할 수 있다. 한쪽 엔진만으로는 날아오를 수 없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수출과 내수(소비+투자)라는 두 엔진이 같이 가동돼야 균형 있는 성장을 할 수 있다. 한국과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 국가라도 수출에만 의존하고 내수를 등한시할 수 없는 이유다.

4월 수출 510억 달러 기록 #유럽 65% 중남미 30% 늘어 #소비는 0.01% 증가 그쳐 #미·중 변수 등 악재 여전 #“실업률·가계부채 해소돼야”

한국 경제에 수출 중심의 훈풍이 불고 있다. 수출이 좋아지면서 한쪽 엔진은 확실하게 달궈지고 있다. 문제는 다른 쪽 엔진이다. 수출이 늘면서 투자도 확대되지만 소비는 여전히 차가운 윗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출이 늘면 기업의 생산·투자가 증가하고 고용이 확대되면서 소비도 나아져야 하는데 이 연결고리는 아직 확실하게 이어지지 않았다. 현 경기상황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은 왔으나 봄 같지가 않다)’이라고 하는 이유다.

1일 산업통상자원부가 밝힌 4월 수출액 510억 달러는 액수 기준으로 역대 두 번째 규모다. 전년 동월 대비 증가율도 24.2%로 2011년 8월(25.5%) 이후 최대치다. 수출 증가율은 지난해 11월 플러스로 전환한 이후 6개월 이어지고 있다.

내용도 좋다. 품목별로 수출이 고르게 증가했다. 13대 주력 품목 중 9개가 늘었다. 반도체(71억4000만 달러·전년 동월 대비 56.9% 증가)는 역대 2위의 수출 실적을 기록했다.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상승한 데다 새로 출시된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메모리 반도체의 용량이 커진 결과다.

조선업 침체로 부진했던 선박 역시 2척의 해양플랜트 등 총 24척을 수출해 사상 최대 실적(71억3000만 달러·102.9%)을 냈다. 다만 수주 자체가 늘었다기보다 선박이 인도됨에 따라 지난달에 잔금이 들어온 덕분이다. 일반기계(17.3%)는 대중(對中) 수출 증가,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기자재 수출 등으로 역대 4위에 해당하는 42억9000만 달러어치를 팔았다.

지역별로도 유럽연합(EU)에 64억2000만 달러(증가율 64.9%)를 팔아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해양플랜트 한 척이 영국으로 수출된 게 큰 이유였다. 중동(-3.6%)을 제외한 중남미(30.4%)·인도(27.3%)·일본(23.8%) 등도 모두 플러스 증가율을 기록했다. 수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중국 수출도 10.2% 늘어 6개월 연속 증가했다.

최근의 상승세가 지난해 상반기 수출이 급감한 데 따른 ‘기저효과’란 비판에서도 자유로워졌다. 채희봉 산업부 무역투자실장은 “급반등한 선박을 제외한 분야의 수출 증가율도 두 자릿수(16.8%)”라며 “지난해 수출 감소분을 넘는 증가율을 3개월 연속 기록했다”고 말했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수출이 늘어나자 기업이 투자를 늘리기 시작했다”며 “수출이 경기 회복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통계청의 ‘3월 산업활동동향’에 따르면 2월 -8.5%였던 국내 설비투자 증가율이 3월 12.9%로 반등했다.

문제는 이 불쏘시개가 소비라는 다른 엔진을 점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3월 소비(소매판매)는 0.01% 증가하는 데 그쳤다. 김성태 한국개발연구원(KDI) 거시·금융경제연구부장은 “앞으로 소득이 늘지 않는 한 큰 폭의 소비 증가세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수출 상승세에 취해 있으면 안 된다는 경계의 목소리도 나온다. 대외 악재가 터져 나오면 수출은 곧바로 꺾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당장 미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비롯해 미국이 맺은 모든 무역협정을 전면 재검토하라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홍준표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트럼프는 셰일가스 생산 증가도 천명하고 있다”며 “이로 인해 하반기 국제유가가 급락하면 한국 수출엔 악재”라고 말했다. 중국 경기도 낙관적이지 않다. 김영익 교수는 “중국이 하반기 이후 산업 구조조정에 나서면 생산·투자가 침체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도 이런 상황을 인식하고 있다. 채희봉 실장은 “통상환경 변화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며 “미·중에 치우친 수출구조를 바꾸기 위해 신시장 개척에 힘쓸 것”이라고 했다.

홍준표 연구위원은 “수출이 홀로 경기를 이끄는 건 한계가 있다”며 “새 정부는 일자리와 가계부채 대책을 마련해 ‘소득 증가→소비 확대’를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태 부장은 “추경 같은 일회성 부양책이 아니라 구조 개혁을 통해 비효율을 제거해야만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했다.

세종=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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