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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G] 제주의 아픔을 평화의 현장으로 ① 4.3평화공원

T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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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효·김민경

하루 평균 제주공항을 드나드는 여행객은 수천 명. 특히 4월에는 예쁜 유채꽃밭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인파로 더욱 인산인해를 이룬다. 하지만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제주도의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현재의 제주도가 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역사를 품고 있는지 말이다. 제주의 근현대사를 살피기 위해 5명의 청소년기자들이 나섰다. 채 아물지 못한 상처를 지닌 많은 장소 중에서도 4.3평화공원과 제주평화박물관을 찾아갔다.

1. 4.3평화공원을 찾아가다

4.3사건의 시발점은 바로 3.1절 발포사건이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대회 후 관덕정 앞 광장에서 어린아이가 기마 경관의 말에 치이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돌을 던지면서 몰려들었다.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은 무분별하게 총격했고, 그로인해 민간인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제주도민은 3.10 파업으로 발포사건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진상조사에 나선 미군정은 제주도민의 경찰에 대한 반감에 더해, 3.1사건 대책 투쟁위원회를 결성한 남로당이 시민들을 선동해 총파업이 증폭됐다고 분석했다. 그 대응은 민심 수습이 아닌 좌익세력 척결이었다.

남로당은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반대(통일정부 수립 찬성)하던 단체로 반공주의적이었던 정부는 이에 지나친 무력으로 대응했다. 수많은 학살과 고문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가 주도하여 초기 350명, 전 기간 통틀어 500명을 넘지 못한 인원을 동원해 죽창으로 겨우 무장하고 우익단체를 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무력충돌 및 진압은 1954년 9월 21일까지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4.3평화공원은 4.3학살터 중 하나였던 거친오름에 세워진 4.3사건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공원이다. 공원 내에는 4.3평화기념관, 위령탑과 제단, 봉인관, 그리고 행방불명 표석이 자리해 있다. 그중 이번 취재에서는 4.3평화기념관 내의 전시관을 상세히 살펴보았다. 4.3사건뿐만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역사적 배경부터 피해 유적발굴 현황까지 재현 조형물과 모형, 그리고 영상 등을 통해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4.3무장봉기 이후 1948년 10월 17일 포고한 전도 해안선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밑 산악지대를 모두 불태우고 그 지역의 사람들을 이유 불문하고 총살했던 초토화 작전의 진행구역 시뮬레이션 모형은 그야말로 제주도 전체가 불구덩이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입구를 지나면 사람들의 은신처였던 다랑쉬굴의 재현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당시 사용하던 식기 도구와 물품들뿐만 아니라 어떻게 매장되었는지까지 그대로 복원해 다소 충격과 안타까운 마음이 교차하는 장소다.

전시관 곳곳에서 상영되는 4.3 사건의 피해·희생자들의 상황을 재연하거나 당시 촬영된 영상들 또한 4.3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전시관 입구에는 추모비로 세워질 백비가 뉘여져 있다. 4.3 사건이 아직도 정확하게 항쟁인지 또는 시위인지 정의가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4.3 사건이 무엇인지,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보여준다.

지난 4월 3일,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 장휘국 광주광역시 교육감, 최교진 세종시 교육감, 그리고 여러 유명 인사들이 제69주년 4.3 추념식에 참석했다. 4.3평화공원에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제주도의 아픈 역사는 이제 70주년을 한 해 앞두고 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도 대중에게 쉽게 알려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제주작가회의가 최근 펴낸 4.3추념시집

제주작가회의가 최근 펴낸 4.3추념시집 '사월 어깨너머 푸른 저녁' 중 ‘모르쿠나(고문삼)’.

우리는 이 역사를 지금의 시선이 아닌 ‘그때’의 시선으로 마주하고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을 독자 여러분에게 알리고 싶다.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1947년 3월 1일 이후까지도 우리는 미군정 시대이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가 다양하게 존재했었는 시기였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자칫 4.3사건은 공산당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우리 기사가 올바른 시선으로 역사를 마주하고 당시 제주도민의 모습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사 작성에 많은 도움을 주신 4.3평화기념관 고진희 문화해설사님 감사합니다.

글·사진=김지효·김민경(제주 브랭섬홀아시아 9) TONG청소년기자 구억리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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