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전 장관. "송민순 주장은 당시 청와대 정책결정구조와 모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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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2007년 북한 인권결의안 기권과 관련한 최근의 파문에 대해 “송민순 전 외교장관의 주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의 안보정책 의사결정 구조에 비춰 보면 이치에 맞지 않고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23일 베이징대 연구실에서 인터뷰중인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23일 베이징대 연구실에서 인터뷰중인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노무현 정부 초기부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과 상임의장, 통일부장관을 잇달아 지낸 그는 “참여정부의 외교안보정책 논의구조와 절차를 만들고 4년간 운영한 사람으로서 보기에 송 전장관의 주장에 허점이 많다”고 주장했다. 베이징대 방문교수로 중국에 체류중인 그는 23일 인터뷰를 자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송 전 장관이 자료까지 제시했는데 어느 부분에 허점이 있다는 얘긴가.  
“11월 16일 대통령 주재 회의에서 기권 결정이 이미 내려졌는지 여부가 이번 논란의 쟁점이 돼 있는데 송 전 장관의 회고록에 따르더라도 그 날 회의에서 결정이 난 사실이란 걸 알수 있다. 만일 이 회의를 주재했는데도 결론이 없었다면 회의를 끝내면서 다음 회의 기일을 잡는게 정상적이다. 인권결의안 표결은 21일로 코앞인데 대통령과 안보실장, 외교장관 등은 아세안+3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19일 출국하게 돼 있었다. 그런 긴박한 상황이라면 바로 다음날 회의를 재개하는 게 상식인데 그러지 않았다. 15일 장관들간의 회의에서 의견이 나뉘자 16일 대통령이 회의를 직접 주재하며 기권으로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송 전 장관은 결정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강한 자기 확신 때문에 뭔가 왜곡된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론이 없었길래 송 전장관이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18일 재논의하게 됐다는 게 송 전장관의 주장이다.
“송 전 장관은 회고록에서 문재인 비서실장이 회의를 주재했다고 적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그 날 회의는 표결 찬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공식 외교안보부처 장관 회의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만약 그런 목적의 회의였다면 백종천 안보실장이 회의를 주재했어야 했다. 참여정부의 청와대 비서실장은 외교안보정책 결정라인에서 완전히 배제돼 있었다. 지금은 외교안보수석이 비서실장 산하지만 당시에는 안보실장 산하였다. 비서실장 밑에는 외교안보 관련 직원이 한명도 없었다. 초기엔 NSC 회의에는 참석도 안하다가 나중에 대통령이 ’그래도 비서실장은 회의에 들어오라‘고 해서 끼게 됐지만 실제로는 옵저버 정도의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18일 비서실장 주재 회의는 이미 결정된 사실을 재론하기 위한 회의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송 전 장관도 회고록에 ’저녁늦게 서별관에 도착하니 다른 네 장관이 이구동성으로 ‘왜 이미 결정된 사항을 자꾸 문제 삼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다고 적지 않았나. 송 전 장관도 이런 시스템을 모를 리 없다. ”
국민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어찌됐건 표결 전에 북한에 의견을 구할 필요가 과연 있었느냐는 점이다.  
“그 당시 내가 직접 관여한 일이 아니라 나중에 들은 바는 있지만 내가 내막을 얘기할 입장은 아니다. 다만 당시의 남북 관계는 지금으로선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다른 상황이었다. 당시 남북정상회담 후속조치가 논의되고 있었다. 남북 회담뿐 아니라 비핵화 6자 회담도 그 해 10ㆍ3 영변핵시설 불능화 합의가 이뤄질 정도로 동력을 얻고 있을 때였다. 북한 인권이 중요하지 않아서 기권하자는 게 아니라 전략적 판단에 따라 기권을 선택한 것이다. 인권도 중요하지만 한반도 평화 정책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전략적 사고를 한 것이다.  송 전 장관의 전임 반기문 장관 시절에도 기권을 했는데 그럼 반 전 장관은 송 전 장관보다 인권의식이 약해서 강하게 반대하지 않았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 또 지금 논란이 된 표결에 앞서 2006년에는 북한의 1차 핵실험 직후 인권결의안 표결이 이뤄졌는데 통일부 장관인 내가 다른 부처의 찬성표결 의견에 강하게 반대하지 않았다. 송 전 장관은 그해 통일부가 강하게 반대해 충돌이 있었다고 썼는데 실제로 그러지 않았다. 그만큼 기억은 다른 것이다. ”

이 전 장관은 “논란이 된 2007년 표결 당시 나는 청와대를 나와 세종연구소로 복귀한 상태지만 지금 논쟁을 보니 중요한 포인트를 빠뜨리고 있는 듯 해 꼭 알리고 싶었다”고 덧붙이며 인터뷰를 끝맺었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yyjune@joog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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