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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도대표가 아니다|금창태<편집국장대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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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려가 결코 기우만은 아니었다. 우리 정치문화의 밑바탕에서 보이지 않는 변수로 끈질기게 작용해온 지역감정이 16년만에 부활된 대통령직선 선거전이 본격 개막되자 위험스런 폭발을 향해가는 조짐이다.
지난달 김대중평민당총재의 부산집회방해·숙소앞 난동사건에 이어 14일 김영삼민주당총재의 광주집회 저지 난동, 다시 15일 김대중총재의 대구집회 연설방해등 꼬리를 물어가는 일련의 사태는 바로 그같은 심상치않은 상창의 가시적 징후로 보여진다.
자칫 이대로 가다간 진작부터「망국적 고질」로 지적되어 온 지역감정이 이번 선거의 역사적 의의를 무화하고 민주화를 통한 국민 화해·민족 단합의 성취 대신 민족 분열·국민 갈등의 앙금만 남길지도 모른다는 우려조차 나오고 있다.
6.29이전 집권세력이 그토록 완강히 직선제를 반대하며 내세운 이유가 바로 이런 병폐와 부작용이었고 보면 마치 그것을 교과서적으로 실증해보여 정당화하는듯한 이즈음의 사태는 더욱 당혹스럽다.
과연 유신이래 l6년「빼앗긴 국민의 정부 선택권을 되찾기 위해」학생·시민들이 치른 값비싼 희생이 이런 추태의 난장판으로 보상되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유별난 지역감정은 외국언론의 눈에도 심각하게 비치고 있다.『두김씨 지지세력간의 지역감정 대립은 외국의 인종갈등 만큼이나 심각하다』고 보도한 14일 워싱턴포스트지의 기사는 그 대표적인 예다.
외신면 머리로 실린 이 장문의 분석기사는『현재 한국 유권자의 투표성향을 예측할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연령이나 교육수준 또는 이념이 아니라 출신지역』이라고 단정한다.
이같은 분석이 실제와 다르다고 자신있게 반박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동안 우리사회에서「망국적 지역감정」에 대한 우려와 해소를 위한 논의는 계기가 있을 때마다 수없이 되풀이 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에서 지역감정은 해소·순화되기는 커녕 농축·악화되어 왔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말로써 강조되는 만큼 실효성 있는 해소의 노력은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지역감정의 뿌리는 거슬러 올라가면 1천3백여년전 삼국분립에까지 이를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다분히 관념적인 천착(穿鑿) 이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같은 피를 이어받고 같은 언어를 쓰며 같은 문화를 일구며 살아온 단일민족이다. 여느 민족처럼 종교적인 갈등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것도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특정지역간 대립의 양상으로 표출된 것은 사실은 최근 몇십년의 일이다. 구체적으로는 61년 5.16 군사쿠데타를 계기로 시작됐다. 경북출신의 박정희소장이 대통령이 된뒤 3선개헌, 유신의 변칙으로 18년 장기집권을 하면서 인재등용·개발투자가 현저히 영남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였고, 이같은 상황은 5.17, 광주사태를 거쳐 제5공화국에까지 이어졌다.
한세대에 가까운 26년동안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하에서 영남출신 군부엘리트를 축으로 하는 군·정·산 복합체가 우리 정치와 경제를 지배하며 한편에선 호남지역의 상대적박탈감·소외감이 누적·증폭·심화되는 양상을 보여왔다.
호남의 시각으로 보면 영남은「게임의 룰」에 벗어난 변칙적 방법으로 모든 것을 차지하고 독식하면서 미안한 줄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오히려 그것을 당연시하고 으스대는 편협하고 몰염치한 이기주의로 비쳤다.
영남의 시각에 비친 호남은 모든 일에 사사건건 필요 이상으로 피해의식을 갖고 불평의 눈으로 보고, 불만에 차서 기회만 있으면 도전하고 반대하는 성가신 경쟁자로 인식돼 왔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 같다.
거기다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지역감정까지 부추겨 악용하는 죄악을 저질렀다. 불균형과 격차를 시정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그것은 대부분 전시적· 상징적인 것에 불과했다.
결국 영·호남대립의 구조적 원천은 정통성에 의심을 받는 중앙집권적 권의주의 권력의 자기 모순에서 비롯된 그릇된 시책에 있었던 것이다.
독재권력의 피해자라는 점에서 영남과 호남을 포함한 전 국민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민주화의 새출발에 공교롭게도 영남과 호남에 각각 기반을 둔 두김씨가 후보단일화에 실패하면서 하나였던「민주국민」이 다시 지역으로 갈리는 어이없는 상황에 봉착해 있다.
지역감정의 원천적 해소는 장기적으론 정통정부수립·권력분산·민주화에 있다.
나눔으로 화해하는「분배의 정의」실현은 여기서도 원칙이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 다가온 대통령선거에서는 오직 한가지 방법밖에 없다.
대통령후보를 특정 출신지역의 이익 대변자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인식을 시민들이 깨우치는 길밖에 없다. 대통령은 도대표가 아니라 전국민을 이끌어갈 나라의 지도자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특정후보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집단이기주의의 군중심리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지역감정은 좋은 의미에서는 사회발전의 큰 동력이 되는 향토애이기도 하다. 그 애착과 사랑이 방향을 잘못 잡을 때 문제가 된다.
이번 선거에서 영·호남의 경쟁은 자기 고장 출신후보를 당선시키기에 둘 것이 아니라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능력이 가장 뛰어난 후보고르기에 모아져야할 것이다.
우리는 영남인·호남인·기호인·서북인이기 전에 한국인, 더 크게는 세계인이다. 동서화합 없이는 한국인의 설땅이 없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계속에서의 한국인의 체면을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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