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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러기] 할머니, 삶 내려놓고 하늘 가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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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맑은 날
김용택 글, 전갑배 그림
사계절, 60쪽, 1만5000원

무릎부터 쳤습니다. "그래!" 싶은 마음 때문이지요. 꼭 20년 전 발표됐던 김용택(58)시인의 산문시 전문(全文)을 그대로 앉혀 그림책으로 바꿔놓은 이 책은 기획이 거둔 열매입니다. 예전'섬진강 시인'김용택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산문시 '그 여자네 집'에 감동받은 소설가 박완서 선생이 같은 제목의 단편소설을 만든 걸 기억하시죠? 고교 교과서에도 실린 그 작품과 짝을 이룰만큼 뛰어난 산문시'맑은 집'은 이제 그림책으로 몸을 바꿔 우리 앞에 등장한 겁니다.

5년 전이죠? 이미륵의 성장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가 그림책 으로 나왔던 적이 있었지요. 누구나 입을 모았지요."딱"이라구요. 하지만 '맑은 날'에 대한 반응은 다를 겁니다. "할머니 초상 얘기 아냐?" "칙칙할 걸…" 아닙니다. 편견이지요. 아이들은 '미숙한 꼬마'가 아닙니다. 아동학자들은 10대 전후 아이들도 어른 못지않은 정서를 품고 있다고 귀뜸합니다.

상실감 혹은 마음의 상처에 대한 느낌도 마찬가지이지요. 이오덕 선생 같은 분들이 짝짜궁 식 동화.동시 대신 리얼리즘 문학을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겁니다. '맑은 날'이 그 경우입니다. 우선 시'맑은 날'은 정지용의 몇몇 동시 처럼 그중 살갑게 구사된 토속어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자, 몇 구절을 천천히, 뜸들여 읽어 보실래요? 시골 할머니의 호상(好喪), 그걸 받아들이는 가족 풍경이 담담하게 그리고 느릿느릿 펼쳐집니다.

"할머니는 아흔네 해 동안 짊어졌던 짐을 부리고 허리를 펴, 이 마을에 풀어 놓았던 숨결을 구석구석 다 거둬들였다가 다시 이 작은 강변 마을에 골고루 풀었습니다." "할머니가 숨을 모두 거둬들였다가 마지막으로 길게 풀었을 때, 가장 낮아진 새벽 물소리와 귀목나무 죽은 삭정이 가지 몇 개가 바람 없이 부러져 떨어지는 소리를, 나는 식구들의 울음소리 속에서 들었습니다."

열 일을 제쳐두고 초상 마당에 모여드는 이웃들, 빈 상여 놀이판을 벌여 슬픔을 달래던 시골에서의 품앗이, 이내 할머니를 묻고 돌아와 쓸쓸함을 달래는 마음…. 마치 영사기로 보여주듯 손에 쥐어지는 구체적 묘사때문에 전갑배(서울시립대 교수)씨의 그림작업은 어렵고도 쉬웠을 겁니다. 그림요? 정말 좋네요. 수묵담채(옅은 묵에 가벼운 채색)로 끌고 간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전통 상례(喪禮) 정보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번역서 홍수 속에 등장한 '토종 그림책'은 정말 보기 좋습니다. 이를 통해 아이들이 삶, 그리고 그 삶과 잇닿은 죽음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소득일 겁니다. 아시죠? 좋은 그림책은 어른이 읽어도 역시 좋다는 걸요.

조우석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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