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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 포틀랜드 그리고 어느 작은 도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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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호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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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볼로냐는 인구 40만 명 정도의 작은 도시다. 우리나라로 치면 경북 구미나 전북 익산 정도. 이탈리아 여행 책자에서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베네치아와 피렌체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 이동 도중에 잠깐 들러볼까 망설이게 만드는 곳 정도로 기억하려나?

어린이도서전 열린 볼로냐의 매력 #예술축제 봤던 포틀랜드 인상적 #공연 보고 화가 그림 사는 곳이 #우리나라 도시라면 더 기쁠 듯

하지만 1088년에 세계 최초의 대학이 설립된 곳이고 2011년에는 이탈리아의 107개 도시 중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힌 곳이기도 하다. 『신곡』을 쓴 단테, 유럽통합의 상징 에라스무스가 볼로냐대학을 나왔고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가 45년간 이곳에서 기호학을 가르쳤다. 기원전 10세기부터 형성된 도시 곳곳에는 수천 년 역사의 흔적을 보여주는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이런 배경 위에서 마세라티·람보르기니 같은 자동차를 만든다. 두카티 같은 모터사이클도 이곳 출신이다. 대형 소매점 체인과 금융회사가 본사를 두고 있으니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다.


지난주에 책 만드는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렸던 도시 이름이 볼로냐였을 것이다. 국제 어린이도서전이 여기서 열렸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출판사들이 이곳에 전시관을 열었고 자신의 작품을 알리고 싶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몰려와 전시장 초입에 작품을 빼곡하게 걸었다. 세계 어린이책 출판의 동향을 한눈에 볼 수 있고, 그림과 이야기가 새로운 기술과 연결되어 출판 산업의 국면을 전환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책들 속에 묻혀 문화적인 풍성함을 한껏 즐기면서 사업의 기회까지 챙기려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찾아든다.

유럽 최대 규모의 전시 시설을 갖추고 있는 볼로냐에선 이밖에도 모터쇼·타일쇼 등이 열린다. 화려한 매력에선 형제 도시들보다 떨어지지만 문화적·경제적 콘텐츠를 만들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이 여행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목적이 달라서 여럿이 함께 길을 나서려면 적당한 타협이 필요하다. 아이가 없는 동생 부부는 늘 휴양지, 리조트를 선호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떠나야 하는 우리 집은 아이들이 배우거나 즐길 것이 많은 곳을 고르려고 한다. 취향에 따라, 그리고 처한 환경에 따라 선택에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내가 견해차가 있지만 함께 가야하는 친구들을 설득할 때 사용하는 카드는 문화가 있는 여행. 휴양과 놀이, 그리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선택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 중 하나는 미국 오리건주의 포틀랜드에서 보냈던 1주일이다. 볼로냐의 대서양 너머 자매도시인 포틀랜드는 최근에 미국에서 젊은이들이 가장 살고 싶은 도시로 떠올랐지만, 볼로냐 같은 오래된 문화 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학이 있지만 규모가 큰 것도 아니다. 하지만 쾌적한 기후와 온화한 자연 경관이 있고 각박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문화가 있다.

최근엔 ‘힙스터(Hipster, 자연친화적·진보적 성향의 독특한 문화 코드를 공유하며 고유한 패션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성지’라는 이야기까지 듣는다. 내가 머물렀던 기간중 마침 현대예술축제가 열렸다. 하지만 브라질의 삼바처럼 도시 전체가 축제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도시 곳곳의 공연장에서 뉴욕·런던·브뤼셀·도쿄 등지의 가장 뜨거운 예술적 실험이 초청돼 무대 위에 올라온다.

휴가의 여운을 느끼며 게으르게 일어나 정오 무렵 시작하는 예술가나 감독의 짤막한 이야기를 듣고 맛난 브런치를 즐기면서 그날의 공연을 체크한다. 서너 시에 시작하는 공연부터 한두 개 공연을 보거나 카페에서 허송하는 것은 자유. 밤에 공연장 근처의 비어가든에서 공연을 마친 배우·무용가들과 어울려 시원한 맥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나는 그곳에서 무용이 어떻게 현대 공연 예술의 아방가르드에 설 수 있는지를 알았고 새로운 시도로 이전에 없던 길을 열어가는 젊음과 만났다.

그 다음 휴가는 요코하마 댄스 페스티벌에서 일주일 동안 무용만 보기도 했고, 다음엔 전주에서 사흘 내내 먹고 영화보기를 반복했다. 훌륭한 기획자들이 정성을 다해 고른 문화 콘텐츠들을 쉬엄쉬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황송한 일인가. 그들이 축제를 만들기 위해서 투여한 노력의 크기를 알기에 더 고맙다.

나는 브뤼셀의 쿤스텐 페스티벌에 가 보고 싶고, 안시에서 열리는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가 며칠 동안 만화 영화만 보고 싶다. 헬싱키의 백야에 열린다는 공연 축제도 꼭 가보고 싶다. 굳이 바젤의 아트페어가 아니라도 작은 도시의 아트페어에서 작가의 길을 시작한 화가의 그림을 한 점 사고 싶고, 그리고 그 도시가 우리나라의 작은 도시라면 더 기쁠 것 같다.

주일우

이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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