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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의 새 출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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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후남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후남문화부 차장

이후남문화부 차장

나라마다 다르되 한국은 3월이 새 학기, 새 학년의 시작이다. 새 출발에 따른 긴장과 스트레스도 높다. 스트레스는 앞서 치르는 입시가 더하다. 요즘 대입수학능력시험은 11월, 예전 대입학력고사는 대개 12월이었다. ‘입시한파’란 말도 그래서 나왔다. 나무가 잎을 떨구고 추위를 견뎌낸 뒤 새 잎을 틔우듯 입시·졸업·입학은 춥고 황량한 계절에 이어져 왔다.

소설가 박완서(1931~2011)의 수필에는 뜻밖의 경험이 나온다. 그는 4월에 입시를 치러 6월 초 대학생이 됐다. 고교과정을 합해 6년제였던 당시 그의 중학교 졸업은 5월이었다. “모든 것이 궁핍한 시대였건만 내가 나의 졸업식을 가장 화려한 졸업식으로 기억하는 건(중략) 그 계절의 화려함 때문이기도 했다. 5월은 라일락의 계절이요, 마거리트의 계절이었다. 지금처럼 요란한 꽃다발이 졸업생을 축하해 주는 대신 무르익은 천지의 봄이 우리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것 같았다.”( 수필집『노란집』중에서)

그의 기억에 따르면 해방 이듬해부터 9월로 학기초가 바뀌었다가 다시 봄에 졸업·진급하는 제도로 환원하며 5월 학기말, 6월 학기초를 시행한 과도기가 있었다. 바로 그가 대학에 들어간 해다. “입시나 졸업 하면 동상 걸린 발을 동동 굴러야 하는 혹한부터 생각나는 버릇이 있는지라 봄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화창한 날에 그런 일들을 치를 수 있다는 건 50년도 졸업생에 한한 일회적인 특별한 혜택만 같아서 이게 웬 떡이냐, 그저 황홀할밖에 없었다.”

‘50년도’에서 짐작하듯 신입생의 기쁨은 짧았다. 한 달도 못 돼 전쟁의 포성이 시작됐다. 이후의 기억과 함께 작가는 담담히 썼다.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입시를 치르고 눈부신 6월에 입학할 수 있었다는, 우리 교육 사상 단 한 번뿐인 행운이 주어졌다는 것만으로 50년을 특별한 해라고 말한 건 아니다.”

입시나 졸업·입학처럼 겨울에 거듭된 현대사도 있다. 80년대 이후의 대통령 선거와 취임식이다. 간선제였던 81년의 취임식이 3월 초, 이후 직선제 취임식은 12월 선거를 거쳐 줄곧 2월 25일 열렸다. 전에도 7~9월이나 12월이었을 뿐 이번 같은 5월은 처음이다. 게다가 이번엔 곧바로 임기가 시작한다.

계절로는 축복이되 지금에 이른 과정을 전부 축복이라긴 어렵다. 추위 속에 촛불을 들고 전임 대통령을 탄핵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 대통령으로 인한 상처는 여전히 크다. 경제상황도 미세먼지로 뿌연 시야와 비슷하다. 봄날의 취임식이 진정 축복이 될지는 취임 이후에 달렸다.

박완서는 다른 수필에 “올라갈 때 힘을 다 써버리면 결코 의젓하게 내려오지 못한다”고 썼다. “오르막길에 기운을 다 써버리면 내려올 때 다리가 휘청거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제 힘으로 당당하게 내려오려면 올라갈 때 힘을 다 써버리지 말고 남겨놓아야 한다.” 그의 말마따나 등산만 아니라 “권력이나 명예, 인기”에도 해당되는 얘기다.

이후남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