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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시대를 읽은 리더, 미래를 꿈꾼 리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
박숙자 지음, 푸른역사

260쪽, 1만4900원

최인훈·김승옥·전혜린·전태일 #작품·인생에서 만난 ‘책 속의 책’ #국가·혁명·여성·노동이란 무엇인가 #현대사 관통하는 질문 따라가기

책 읽기에 남달랐던 남녀 4명을 등장시킨 일종의 ‘서재 소설’이 탄생했다. ‘길 없는 길’을 가기 위해 책을 붙잡고 고군분투한 준, 정우, 혜린, 태일을 주인공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청년들의 삶과 문화가 서가(書架)를 누비며 펼쳐진다. 책의 기억, 책의 추억, 책의 역사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한 편의 소설처럼 구성지다. 책 잔치를 벌인 박숙자 경기대 융합교양학부 조교수는 “그들(4명)은 다른 세계를 읽어낸 리더(reader)이자 인간이 살아갈 만한 세상을 상상한 리더(leader)였다”고 정의한다.

첫 인물 준은 최인훈 작가가 1960년 발표한 중편소설 『광장』의 이명준이자 1963~64년 ‘세대’에 연재한 『회색인』의 독고준이다. 준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국가가 무엇이고 국민이 누구인지 생각했던 ‘전후세대’의 청년을 대표한다. 북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게걸스럽게 책을 읽으며 남을 상상했던 준, 아버지가 북쪽에 남아있던 남쪽의 철학도 준은 해방 이후 남과 북, 어느 국가를 선택할 것인지 묻는 질문에 “국가를 선택하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두 번째 인물 정우는 김승옥 작가의 62년 단편소설 ‘환상수첩’의 주인공이다. 한글로 된 세계문학을 닥치는 대로 읽은 정우는 소설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4·19혁명과 5·16 쿠데타를 경험한 한글세대 대학생으로서 그는 현실참여와 이탈의 갈래 길에서 휘청댄다. 환청처럼 그를 괴롭히는 “무관심하라”는 “가만히 있어라”는 시대의 명령이었다. 무산된 혁명 이후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리는 대학생의 내면을 대변한 정우는 골방에 스스로를 가두고 괴물로 변해간다.

40~70년대 청년들이 읽은 책. 젊은이들이 국가·여성·노동·인간을 논했던 시대의 증거다. [사진 푸른역사]

40~70년대 청년들이 읽은 책. 젊은이들이 국가·여성·노동·인간을 논했던 시대의 증거다. [사진 푸른역사]

유일한 여성인 전혜린(1934~65)은 독특한 감수성의 글로 지금도 회자되는 독문학자이자 번역가다. 31세로 요절한 뒤 출간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매 순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고민했던 한 비범한 인간의 속내를 보여준다. 혜린은 독일 유학 후 여성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한국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했고 서구 문명의 핵심을 모국어로 번역하며 주체로서 감응한 세계를 일궜다.

마지막 인물인 전태일(1948~70)은 가난한 삶 속에서 소외를 경험했던 노동하는 소년소녀들의 대변자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가 남들처럼 살려고 매달렸던 것이 배움이고 독서였다. 태일은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경전 삼아 지옥 같은 노동 환경을 개선하려 했으나 19세 평화시장 재단사에겐 역부족이었다. “나는 왜 언제나 이렇게 배가 고파야 하고 항상 괴로운 마음과 몸일까” 자문하던 그는 70년 11월 13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를 외치며 분신했다.

박숙자 교수는 “이 청년들은 제몫을 가지지 못한 벌거벗은 자들이었으나, 그럼에도 국가와 난민, 혁명과 언어, 여성과 번역(반역), 노동과 인간이 무엇인지 상상했고, 그 상상이 지금 현재의 삶이 되었다”며 “우리 역사는 이들이 읽어낸 만큼의 역사”라고 4명 인물을 기렸다.

[S BOX] 가난한 청년들의 ‘작은 기쁨’ 삼중당문고

지은이는 원래 해방 후 책 읽기 문화사를 ‘삼중당문고의 추억’이란 제목으로 기획했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이후 집필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살아남지 못함’에 대한 기억과 애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다. 그럼에도 부제는 ‘삼중당문고 세대의 독서문화사’라 붙였다. 삼중당문고는 책이 희망이었던 1970년대 대한민국 빈자(貧者)에게 일종의 복음이자, 그 시절 청년들의 꿈을 기억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75년 2월 첫 선을 보인 삼중당문고는 저렴한 200원 균일가로 서점가에 파란을 일으켰다. 1000원 한 장이면 다섯 권을 살 수 있는 ‘300만 학생의 여름방학 교과서’로 기획된 300여 권의 목록은 국내외 문학과 고전을 적절히 배합해 주머니 속 도서관이라 불렸다. 장정일 작가는 문화적 민주주의를 일군 이 문고판의 추억을 기린 시 ‘삼중당문고’에서 “개미가 사과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 먹은/경제개발 몇 개년 식으로 읽어간 삼중당문고”라 했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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