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대통령도 ‘탄핵 리스크’ … 막연한 사유 구체화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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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호 06면

헌재 탄핵 심판 절차상 문제점 복기

헌법재판소가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재 대심판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했다. 헌재는 92일간 탄핵 사유를 심리한 끝에 파면 결정을 내렸다. 사진공동취재단

헌법재판소가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재 대심판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했다. 헌재는 92일간 탄핵 사유를 심리한 끝에 파면 결정을 내렸다. 사진공동취재단

“복기(復棋)가 중요한 것은 바둑뿐만이 아니다.”

어떤 헌법과 법률 어겼을 때 #탄핵되는지 명확히 정해야 #재판관 임기 맞춰 심리 서둘러 #‘D-Day’ 재판 등 불공정 논란 #임기 종료 전 후임 임명해야

헌법재판관을 지낸 한 법조인에게 이번 대통령 탄핵 결정에 대한 의견을 묻자 돌아온 답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된 결과에 대한 평가는 이제 역사에 맡겨두고 그와 별개로 탄핵 심판 과정에서 불거졌던 여러 문제점을 점검해 개선하는 데 집중하자는 얘기다.

실제 탄핵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절차상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탄핵 심판을 규정한 헌법과 헌법재판소법 조항들이 탄핵 실무 사례가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입법자가 당시 미처 예상치 못했던 절차상의 문제점들이 법 적용 과정에서 불거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실제 사례도 12년 전 진행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기각 판례 한 건밖에 없었기 때문에 헌재 입장에서도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법조계 안팎에선 이 같은 혼선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관련 조항들을 종합적으로 점검해 개선하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가장 문제가 컸던 것은 재판관 임기 부분이다.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이 지난 1월 말 퇴임하면서 헌재는 ‘8인 체제’로 운영됐다. 이후 헌재가 서두른다고는 했지만 심리 진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정미 전 재판관 퇴임일(13일)을 사흘 앞둔 지난 10일에서야 선고가 이뤄졌다. 이마저도 재판부가 신속한 진행을 강조하지 않았으면 힘들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헌재 관계자는 “만약 이정미 전 재판관이 퇴임할 때까지 사건 심리가 성숙되지 않았다면 7인 체제에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많았다. 간단한 각하사건을 제외하고 헌재가 중요 결정을 7인 체제에서 내린 적이 없다. 신속한 심리 덕에 결론을 내릴 만큼 사건이 무르익었고 7인 체제가 되기 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피청구인인 대통령 측에선 반발이 컸다. 헌재가 선고기일을 정해 놓고 거기에 맞춰 심리를 진행하는 ‘디데이(D-Day) 재판’을 한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오기도 했다.

헌법 연구자들은 불공정 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재판관 임기 규정을 손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번처럼 나라의 명운이 걸린 결정이 임박한 상황에서 재판관 임기 문제로 소모적인 논쟁이 재발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에서는 오스트리아처럼 예비재판관을 도입해 결원이 생길 경우 바로 보충해서 심리를 이어가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독일처럼 후임자가 임명되기 전까진 임기 종료 후에도 직무를 계속 수행할 수 있게 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다만 이 같은 방안들이 도입된다 해도 한국 현실에서 효과를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후임자 임명 전까지 직무를 계속 수행하게 한다면 새로운 재판관 임명을 원치 않는 이들이 임명절차를 무한정 지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비재판관을 두는 규정도 9인의 재판관을 대통령·국회·대법원장이 나눠서 지명하게 한 헌법 취지에 맞지 않아 실현 가능성이 낮다. 김상겸 동국대 로스쿨 교수는 “국회가 기존에 있는 법을 지키도록 하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법에 이미 재판관 임기 종료 전까지 새 재판관을 임명하라는 규정이 있다. 이 규정을 반드시 지키도록 하는 방안이 현실적이다”고 지적했다.

탄핵 관련 부실 규정 보완·정비해야

탄핵 사유를 구체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행 헌법은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를 탄핵 사유로 규정하고 있다. 헌재가 해석론으로 중대한 위반사항일 때만 탄핵사유가 된다고 규정했지만 여전히 범위가 넓고 막연하다는 지적이다. 법원장 출신 한 원로 헌법학자의 설명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다음 대통령도 항시적인 ‘탄핵 리스크’를 안고 가게 됐다는 점이다. 앞으론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를 채우는 게 힘들어졌다. 탄핵 사유가 막연한 탓에 어떤 법 위반이라도 정치 환경에 따라 국회의원 3분의 2가 찬성하고 헌재가 이를 받아들이면 이른바 ‘정부불신임’이 가능해졌다. 결국 대통령은 국회해산권이 없지만 국회는 정부를 정치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진 셈이다. 큰 틀에서 보면 이는 3권 분립이 무너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정치적 지형의 불균형은 다음 대통령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며 우리는 정권 말마다 이 같은 불확실성의 위기를 반복해서 겪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어떤 헌법과 법률을 위배했을때 탄핵이 되는지를 법에 명확히 정할 필요가 있다.”

탄핵 절차도 정비해야 한다. 법률상 ‘헌법재판의 성질에 반하지 아니하는 한도에서 형사소송법 절차를 준용한다’고 돼 있지만 어디까지 준용할지 범위가 명확하지 않은 탓에 잡음이 많았다. 검찰 수사 결과를 증거로 채택할지, 증인을 채택할지, 어느 정도로 혐의가 증명돼야 하는지 등을 놓고 대통령 측과 국회 측은 건건이 갈등을 빚었다. 정재황 성균관대 로스쿨 교수는 “애매모호한 준용 규정 대신 헌법재판소법만 봐도 절차를 명확하게 알 수 있게 정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회 탄핵소추 의결 절차도 개선 필요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정세균 국회의장이 ‘박근혜대통령 탄핵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정세균 국회의장이 ‘박근혜대통령 탄핵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중앙포토]

국회가 탄핵소추를 의결하면 자동으로 대통령 권한행사가 정지되는 점도 개선의 여지가 있다. 다른 탄핵소추 대상자인 판사, 감사위원 등과 달리 대통령의 권한행사 정지는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다. 판사와 감사위원 등의 권한이 정지되면 다른 이들이 대신하면 그만이지만 대통령 권한은 민주적 정당성이 없는 총리가 대행하기엔 한계가 많다. 학계에선 헌재에서 가처분처럼 권한정지 여부를 별도로 심리하는 방식을 도입하거나 부통령을 신설해 민주적 정당성을 나눠 가진 부통령이 권한을 대행하고 탄핵된다면 잔여 임기를 소화하게 하는 방안 등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국회의 탄핵안 소추 의결 절차도 개선할 필요성이 크다. 국회법상 탄핵소추를 하기 전 국회는 소추 사유가 적절한지 조사할 수 있지만 이는 재량 사항이다. 이번에도 국정조사와 특별검사팀 수사가 결론 나기 전 탄핵소추안이 의결됐다. 헌법연구관을 지낸 한 변호사는 “충분한 조사를 하고 국회에서 표결했다면 탄핵소추안이 의결됐을지 불투명하다. 외국에선 소추 사유 조사에만 1년 이상 걸리기도 한다. 대통령 권한행사를 정지하는 중대한 결정인 만큼 국회가 더 신중하게 결정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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