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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미니멀리스트가 되리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23호 면

미니멀리즘

상식사전미니멀리즘: 기교나 장식적 요소를 배제하고 사물의 본질만을 최소화해서 표현하는 예술적 기법. 최근에는 최소한의 디자인이나 인테리어, 소유를 주장하는 리빙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일본의 정리 전문가 곤도 마리에는 『미니멀리즘의 방법(How-to of Minimalism)』이라는 책으로 세계적인 미니멀리즘 라이프 선풍을 일으켰다.



나도 미니멀리스트가 되어보자. 지난 주말에 그런 결심을 했다. 집안에서 발에 툭 걸려 열어본 신발 상자에서 29년쯤 전의 카세트 테이프 수십개를 발견했을 때,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십년 묵은 시대도 바뀌는 올 봄이다. 과거를 청산하라고 남한테만 소리지를 일이 아니었다. 더 버티다간 아들이 나중에 자서전에 “어머니는 정리정돈에 장애가 있는 분이었다”라고 쓸지도 모른다. ‘정리는 인생을 빛나게 하는 마법’,‘1평을 정리하면 2000만원 절약하는 것과 같다’. 이런 이론만 머리에 짊어지고 있는 것도 스트레스다. 실천이란 걸 해보자 나도.

이윤정의 공감 대백과 사전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단단히 마음 먹고 옷장을 연다. 시집올 때 해입은 투피스, 그보다 앞서 선볼 때 부모님께 얻어입은 원피스. 첫 해외 출장 때 산 유명 브랜드 트렌치 코트. 이전에도 몇 번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같은 질문을 던졌다. 설레는가? 아 그런데, 결혼하고 나선 이런 비싼 옷은 절대 사 입지 못하잖아. 며칠전 샀던 봄 옷들과는 원단부터 차이가 난다. 좋은 옷 척척 사입던 처녀 시절을 떠올리면 어떻게 설레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일단 보류.

서랍장을 여니 각종 헤어핀, 고무줄 등과 함께 나도 이런 걸 가지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놀란 헤어롤이 튀어나온다. 평생 한 번도 써본 기억이 없다. 그것을 살 때 나도 예뻐지고 싶었던 희미한 의지만 기억난다. 며칠 전만해도 이건 여지없이 쓰레기통 행이겠지만 그 사이에 이 ‘구루프’는 역사적인 물건이 되어버렸다. 다시 제자리에 놓는다.

안 되겠다. 책이 더 쉽겠다. 전체의 10분의 9정도는 손도 대지 않은 것 같아 중고로 팔기도 쉬워보였다. 하지만 29년전 읽었던 그 책을 다시 펴든게 문제였다. 그 때의 밑줄, 그 때의 메모. 그 때의 나는 젊고 좀 더 세상을 알고 싶었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자유로와 져야한다’고 믿었나보다. 스물 몇 살의 내 뜨거웠던 마음을 되살리는 데는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버릴 수 없다.

청년이 된 아들이 다섯 살 쯤에 샀던 흑백 테트리스 게임기도 발견했다. 그동안 눈에 띌 때마다 한번씩 작동시켜봤는데 18년도 넘었다. 기억에는 단 한번도 배터리를 갈아준적이 없다. 나사를 푼 흔적도 없다. 그렇다면 건전지의 수명은 과연 어디까지란 말인가. 그게 아니면 혹시 무한 재생 동력 배터리를 발명하던 괴짜 과학자가 우연히 그 비밀을 후대의 누군가가 발견해주기를 바라며 여기에 숨겨둔 것은 아닐까. 이건 버리긴 커녕 아들에게 물려줘서 수십년 뒤에 역사적 배터리로 남을지 다시 확인해볼만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혼수로 해온 25년 묵은 오디오 세트. 플레이버튼 마저 빠져버린 이 흉물은 정말 버려야겠다고 마음먹고 혹시 아까 그 테이프에서 소리가 날까 싶어 스피커와 연결을 해봤다. 처음엔 꿈쩍 않던 오디오가 잠들어 있던 환자가 깨어날 때의 뇌파 부호기처럼 지지직 움직이더니 큐쾅쾅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감격이었다. 다시 언제 샀는지도 모르는 블루투스 수신기를 꽂았더니 오디오는 그냥 살아난 게 아니라 제2의 삶을 시작했다. 거실을 채우는 음악 소리는 청각으로 다가오는 행복을 오랜만에 일깨워준다.

이쯤되자 이 모든 물건들이 나에게 텔레파시를 보낸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 봐, 나 살아 있다고. 니가 잊고 있다고 이 설렘과 행복을 버리려고? 그래서 여자는 ‘버리지 못하는 여자’로 되돌아왔다. 아무래도 난 포기해야겠다, 미니멀 라이프. ●


이윤정 : 칼럼니스트. 사소하고 소심한 잡념에 시달리며 중년의 나이에도 영원히 철들지 않을 것 같아 고민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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