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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팔던 초심으로 돌아가 ‘샐러리맨 신화’ 부활 노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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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호 22면

법정관리 조기졸업, 재기한 웅진그룹 회장 윤석금

일러스트 =박용석 기자parkys@joongang.co.kr

일러스트 =박용석 기자parkys@joongang.co.kr

‘샐러리맨의 신화’, 언젠가부터 한국 경제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된 말이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나 강덕수 전 STX 회장, 김선홍 전 기아차 회장 등 샐러리맨 출신 경영자가 하나같이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경영 일선에서 퇴진했기 때문이다. 통계적으로도 자수성가형 부호를 찾아보긴 어렵다. 올 초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에서 한국·미국·중국·일본의 상위 주식 부자 40명씩을 분석한 결과, 한국은 상속형 부호가 62.5%(25명)에 달했다. 미국은 10명, 일본 12명, 중국은 단 한 명에 그쳤다.

집집 돌며 영업한 경험 바탕으로 #출판·식품 등 방문 판매로 성장 #극동건설 인수했다 유동성 위기 #재계 31위서 법정관리 곤두박질 #e북 서비스 ‘북클럽’ 회원 40만명 #웅진씽크빅, 영업이익 67% 증가 #정수기·화장품 사업 재개도 모색

창업형 부호가 성장하기 척박한 한국적 현실에서 샐러리맨 신화의 부활을 꿈꾸는 경영자가 있다. 한때 계열사 32곳, 연 매출 6조원 규모의 재계 순위 31위까지 올랐다 한순간 추락했던 윤석금(72) 웅진그룹 회장이다. 주력 계열사 웅진씽크빅은 지난해 영업이익으로 전년(234억원) 대비 61% 증가한 377억원을 벌어들였다. 2012년 당시 웅진홀딩스(현 ㈜웅진)가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 들어간 지 5년 만의 일이다.

14개월 만에 법정관리 조기졸업

법정관리에 들어섰을 당시 웅진이 갚아야 할 빚은 총 1조4384억원이었다. 그렇지만 ㈜웅진은 법정관리 14개월 만인 2014년 2월 채무의 80%를 갚고 법정관리를 조기 졸업했다. 웅진코웨이(현 코웨이)·웅진식품 ·웅진케미칼(현 도레이케미칼) 등 알짜 계열사를 매각하는 등 혹독한 구조조정 덕분이다. 윤 회장도 서울 한남동 자택을 약 100억원에 이명희 신세계 회장에 파는 등 사재출연에 나섰다. 현재 웅진의 채무는 법정관리에 들어갔을 당시와 비교해 단 2%(256억원)만 남은 상태다. 박천신 ㈜웅진 재무최고책임자(CFO)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은 물론이거니와 웅진씽크빅 북클럽 같은 신사업이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한 덕분”이라며 “불경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중견기업, 개인 채권자를 위해 채무를 일시에 조기 변제하게 됐다”고 말했다.

재기의 비결은 윤 회장이 초심으로 돌아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에 힘을 모았기 때문이다. 1972년 27세 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영업사원으로 ‘세일즈맨 신화’를 일궜던 윤 회장은 벼랑 끝에서 다시 교육 출판업으로 눈을 돌렸다. 대신 기존 출판시장에 매달리지 않고 e비즈니스를 기반으로 했다. 전집·백과사전·교과서적 등 교육 콘텐트 총 7500여 개를 태블릿PC로 볼 수 있는 북클럽이 대표적이다. 2014년 8월 시작한 북클럽은 현재 회원 수가 40만 명에 이른다. 150명에 달하는 연구개발 인력이 나이·학년·성별·적성 등에 맞춰 큐레이션을 제공해 부모들이 무슨 책을 사주고 읽혀야 할지 고민을 덜어준다. 태블릿PC가 없는 고객에게는 무료로 기기를 제공하는 대신 2년 약정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비수기(1~2월, 7~8월) 매출 공백까지 최소화했다.

김기영 SK증권 연구원은 “만 5~9세 인구가 매년 줄어들면서 학습지와 전집 판매분야는 사양산업으로 인식돼 왔다”며 “웅진씽크빅이 기존 틀을 깨는 교육 플랫폼 사업으로 정보기술(IT) 업체로 탈바꿈한 셈”이라고 평가했다. 웅진씽크빅의 지난해 영업이익률은 6%로 전년(3.6%)에 비해 2.4%포인트 상승했다. 웅진 관계자는 “1980년 신군부의 과외 금지 조치에 아이디어를 얻어 전국 유명 강사의 수업 내용을 녹음한 강의 테이프를 제작해 성공했던 경험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평가했다.

태블릿PC 기반 e북 서비스가 부활 선봉장에 섰다면 IT솔루션 서비스는 성장세를 뒷받침하고 있다. ㈜웅진은 지난해 10월 IT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중견·중소기업용 IT 솔루션 ‘클라우드원팩 2.0’을 출시했다. 독일 소프트웨어 업체 SAP의 기반기술을 바탕으로 전사적 자원관리(ERP)부터 소비자관계망 관리(CRM), 그룹웨어 등을 한데 묶은 토털 패키지다. 웅진은 여기에도 북클럽과 마찬가지로 렌털 개념을 도입했다. 계정당 월 38만원에 ERP 시스템을 빌려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용인 웅진 IT솔루션사업본부장(상무)은 “5억원이 넘는 IT 인프라 구축 비용을 한번에 마련하기 부담스러운 중견·중소기업들도 렌털 개념으로는 쉽게 도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윤 회장은 자신의 재기 비결로 ‘사람 경영’을 꼽는다. 2010년 그는 서울상호저축은행을 인수했다가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부실의 직격탄을 맞았다. 이때 부실한 저축은행을 회생시킬 목적으로 회삿돈 약 1000억원을 투입했다. 2013년 검찰 조사에서 그는 “저축은행이 망하면 우리 직원들이 전부 실업자가 된다”고 항변했지만 배임 혐의가 인정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비자금이나 차명계좌, 조세 포탈 등 개인 비리 문제에 있어선 깨끗했다. 그는 “다들 운이 없었다고 위로해줬을 뿐 채권단이 웅진을 문제 삼거나 노조가 회사 앞에서 시위를 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법정관리가 시작되자 웅진 일부 계열사들은 법인카드 사용을 제한했다. 자칫 영업력이 약화될까 우려한 당시 이재진 웅진홀딩스 사업총괄본부장(현 웅진 대표) 등 간부들은 수천만원씩 개인 대출을 통해 십시일반으로 영업비용을 댔다. 웅진 관계자는 “한 푼이 아쉬웠던 회사 입장에서 그 돈은 경영 상황 개선에 적잖은 보탬이 됐다”며 “감동한 윤 회장이 회사 정상화 후 가장 먼저 변제한 게 이들 간부 돈이었다”고 말했다. 웅진에너지 흑자 전환 직후에도 윤 회장은 회사가 어려울 때 떠났던 퇴직 사원들부터 재입사시켰다.

흑자 전환 뒤 퇴직 사원 재입사 시켜

그에게는 아직 부활시키고 싶은 사업이 두가지 더 있다. 바로 화장품과 정수기 사업이다. 과거 코리아나화장품과 코웨이로 각각 윤 회장에게 영광을 안겼던 분야다. 지난해 1월 시작한 ‘웅진릴리아트’는 웅진그룹이 새롭게 시도하는 온라인 방문판매 서비스다. 판매원이 직접 고객을 방문하지만 판매는 온라인에서 이뤄지는 방식이다.

정수기는 굴곡 많은 웅진의 발자취를 대표하는 사업이다. 윤 회장은 “1998년 외환위기 때 창고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던 정수기를 보니 회사가 부도로 몰릴 수 있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고민 끝에 ‘차라리 나눠 주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코디로 불리는 주부사원을 대거 고용해 월 3만원을 받고 정수기를 빌려주면서 국내에서 처음으로 가전제품 렌털 서비스를 시작했다. 98년 894억원이었던 매출이 5년 만에 8350억원으로 늘며 웅진은 기적같이 회생했다.

2009년에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가전박람회(IFA)에 참가하며 유럽에서 정수기 렌털 사업에 도전했다. 그대로 마시기 어려운 유럽의 수질을 감안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자신했다. 한국에 이어 유럽 시장에 안착하면 중국과 동남아로 시장을 넓혀나갈 요량으로 해외법인도 잇따라 세웠다. 하지만 금융위기의 여파로 유럽의 경기 침체가 깊어지고 2007년 인수한 극동건설의 유동성 위기까지 겹치며 윤 회장은 2012년 알짜배기였던 정수기 사업 자체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2018년에는 정수기 렌탈 사업을 재개한다는 것이 윤 회장의 계획이다. 코웨이를 MBK파트너스에 매각하며 받아들인 정수기 겸영 금지 조건이 2018년 1월까지기 때문이다. 일단 윤 회장은 터키에서부터 정수기 사업을 시작하기로 하고 2015년 7월 웅진에버스카이를 설립하고 장남 윤형덕 전무를 공동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터키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15년 기준 1만1000달러 수준으로 웅진이 처음 정수기 사업을 한 1998년 한국 국민소득과 비슷하다. 웅진 관계자는 “터키의 대도시 인구밀도가 ㎢당 약 2000명으로 서비스와 고객 관리가 용이하다는 판단했다”며 “렌털에 강점이 있는 만큼 시장에 곧 안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출판사 영업사원으로 시작한 윤 회장은 방문판매 경험을 바탕으로 1980년 웅진출판(현 웅진씽크빅), 1988년 웅진식품, 1989년 웅진코웨이(현 코웨이), 2006년 웅진에너지를 세웠다. 이후 극동건설과 서울저축은행을 사들이며 웅진그룹을 한때 재계 31위까지 키웠다. 그는 “돈 한 푼 없이 시작해 30대 재벌이 되는 엄청난 성장을 했지만, 몇 조원을 태양광·건설·금융에 투자했다가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고했다. 법정관리로 모든 것을 잃었던 그는 출판과 정수기로 재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성공 여부는 미지수지만 꿈을 잃지 않고 도전하는 모습은 여전히 아름답다.

김영민 기자 brad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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